녘의 순간
짧은 기간 동안 어쩌면 겉으로만 연인인 셈이었던 미아와 재연이 서로를 보지 않고 있어도 여전히 엉망인 상태가 계속되는 이유는, 그들의 머릿속에 아직 서로가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를 빨리 지워버리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달랐다. 간단히 말하자면, 재연은 이제 미아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고, 미아는-스스로 생각해보건대- 감정을 제대로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될 것 같아?
공기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재연은 자신이 하필 이제야 미아를 정말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예상하지 못했던 진짜같은 이 감정은 생각보다 단단히 뭉쳐있었다. 그걸 느끼고 있자니, 상처를 받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게 어쩌면 자신의 연기일 뿐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일상을 파고들었다. 힘이 빠졌다. 미아에게 상처받았을 때, 분명히 희열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어.
그리고 또 생각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자신에게 이제 정말 뭔가 깊은 균열이 만들어졌음을, 그날 돌고 돌던 생각의 끝에서 재연은 생각했다.
미아는 자신이 그렇게 재연의 집을 나간 후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라는 걸 인정했다. 항상 제일 전전긍긍하는 건 자신 같은 주변인물이었다. 이런 미아의 머릿속에, 민과 만나기 전까지 재연과 함께 돌아다닌 이 도시의 곳곳이 떠올랐다. 이 도시를 함께 돌아다닌 그가 떠올랐다. 당연했다. 그를 닮은 이 도시가, 이 도시를 닮은 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카페, 패스트푸드점, 대형서점, 편의점, 백화점 뒤, 공원, 길가, 카페 녘, 카페 녹턴, 알레그로 미술관.
가로등 불빛, 차들의 전조등, 모든 건물의 조명, 신호등의 불, 사람들의 휴대폰 화면 빛, 여기저기의 야외등.
샴페인색 조명, 파란빛.
그러다 이 생각의 마지막에는, 결국 이 도시와 섞이지 못한 상태로 돌아와 버린 자신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돌아온 게 아니라, 원래 쭉 이 상태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렸다. 착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재연을 만나면서 시작된 착각이, 상처를 주는 역할을 하게 된 순간부터 심해졌던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상처를 주는 역할을 하니까 이 도시를 완전히 가진 것 같았니?
결국 이 도시를 가지지도 못했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준 상처, 이 상처들만 남았다. 못된 마음만 남았다. 튕겨나가진 않았지만 섞이지도 못했다. 이 도시의 모습이 더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게 여기에 섞이는 것에 성공했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이 멋진 도시룰 사랑하는 이방인이 되었을 뿐. 잠시 정말 이곳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다시 더 큰 압력으로 튕겨져 나가기 직전의 상태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그 상태로 다시 이 도시를 헤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단 하나 선명한 건, 이건 미아가 겪은 도시와의 관계가 재연과는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재연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느 날 반복되던 이 생각의 끝에서 미아는 생각했다.
*
한편 이 도시 안에는, 사강도 있었다.
지금 그는 우리가 말하는 ‘사랑들’ 중에서도 연인 사이에서의 사랑 같은 건 하고 있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재연에게 분명히 말한 대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지겨웠고, 관계가 지겨웠다. 하지만 학을 떼고 싶을 정도로 지겹진 않았다. 재연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를 떠났으니 느낄 수 있는 건데, 그에겐 좀 안쓰러운 데가 있었다. 사강은, 이대로라면 재연은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공유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그를 떠났다. 친구로 남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사실 처음에 재연에게 다가간 이유도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왠지 그와 잘 통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는 건 많지 않았고, 재연과의 관계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관계의 모양이 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생각대로 되는 건 원래 별로 없어.
사강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언제든 또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상태를 좀 더 즐길 생각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7월의 마지막 날의 어느 맑은 저녁, 사강은 익숙한 카페 녘에서 노트북으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는 작년 이맘때쯤, 자신이 전공했던 것과는 아예 다른 학과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이 도시에 와야 했다. 그는 아직 직업이 없었고, 몇 년 후에는 직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학점은행제를 듣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이곳에 온 것이었다. 원래 집은 너무 멀었고, 하는 일도 없는 참에 아예 이 도시에 와서 일 년 동안 살 생각이었다. 그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일주일에 사흘씩 학교에 나오는 교육과정을 신청했다. 그렇게 새로운 학교를 다니며 반년을 살았고, 그 반년 동안 재연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은 애인도 친구도 없는 상태로, 계획했던 일 년이 지났지만 해야 하는 공부를 이 도시에서 끝내리라 생각하며 공부하는 일상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일 년의 기간을 주었다. 그 안에 이 공부를 끝내고 결과를 얻거나, 아니면 다른 걸 시작해야 한다.
그는 그리 절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게 안되면 저걸 할 수 있는 성격과 집안과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정말 이게 안되면 저걸 할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적어도 이 도시에서는 희귀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는 지금 이 공부의 결과를 꼭 얻고 싶었다. 그러고 난 후에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 이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이 도시의 도서관은 너무나 멋졌다. 크고 넓고 조용했으며, 깔끔한 건물 안팎의 직선들은 어떤 날은 마음 벅차게 만들었고, 어떤 날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 공간에서는, 시작되고 전개되어 다시 재현되는 형식의 이야기에서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전개 부분이, 그 가장 멜로드라마적인 그 중간의 길고 긴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어울렸다. 그리 극적이지 않고, 담백했다. 그는 자신이 재연에게서 나온 후 살고 있는 이 일상에 잘 어울릴만한, 그런 건물에 자신의 미래를 깔끔히 그려 놓았다. 그는 예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혼자가 되었다고 달라질 건 별로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의 미래일일뿐, 재연을 만나서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어렵게 느껴지지도 부담이 되지도 않았다. 진짜 어렵고 부담되는 건 그 어떤 것보다 이 일 년을 잘 공부해서, 이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도서관에서 일하려면 봐야 하는 시험도 준비해서, 그렇게 모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면 다른 길을 새롭게 정하는 것.
그는 오늘 막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참이었다. 이 카페 안에서, 그는 건조된 레몬 조각이 올려진 조각 케이크 하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이 계획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말하자면 이런 게, 지금의 그가 집중해서 사랑하는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페 녘의 실내, 조각 케이크에 블랙커피, 계획. 확실하게 도서관으로 향해있는 깔끔한 그 계획. 이런 것들은 복잡하게 굴지 않았다. 그냥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던 친구를 떠올렸다.
사랑을 주고 싶을 땐 사랑을 주면 돼.
사강은 휴대폰을 열어 사랑하는 그 친구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다시 노트북 옆에 내려놓았다. 여느 때처럼 이번에도, 그리운 마음을 일단 반으로 접어놓았다. 이유 없이 그냥 그렇게 했다. 그들은 그냥 그런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했고, 둘 다 그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