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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Oct 08. 2024

열두 개의 순간들. 아홉 (2)

녘의 순간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바깥에서 나는 한여름의 저녁 냄새가 녘의 유리문이 열리는 틈으로 들어와 있었다. 카페는 모르는 사람들로 차있었다. 대부분은 노트북 하는 사람들, 몇 명의 연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혼자 휴대폰을 보는 사람 한 명, 혼자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업하고 있는 사람 한 명, 혼자 책을 펼쳐 공부하는 사람 한 명. 이 혼자인 사람 세 명 중에는, 미아가 있었다.

사강은 미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이 동네에서, 재연과 함께 있는 걸 본 적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 두 연인은 서점 안에서 신간도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은 꽤 잘 어울렸다. 아주 밝지는 않게 살짝 어두운 분위기에, 서로를 어색해하지는 않지만 그리 가깝게 느끼지도 않는 듯한 표정에, 옷 취향이 서로 닮은 것 같다고, 사강은 생각했다.

그는 미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는데, 이번에는 미아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사강은 미아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서 몇 초 뒤에 곧, 다시 미아를 쳐다보았다.


미아는,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익숙한 이 카페에서 영어 원서 책을 읽으며 모르는 모든 단어를 노트에 적고 있었다. 그러다 사강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었다. 사실 아까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미아는, 왼편 한쪽에 있는 일인용 테이블에 사강이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그 역시 사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이 동네에서, 재연과 함께 있는 걸 본 적 있었다. 작년 겨울쯤, 이 카페 바로 앞의 버스 정류장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미아는 누가 봐도 연인인 그들을 슬쩍 구경했다. 사강이 버스에 오르기 전 남자를 안았고, 남자는 여자가 버스에 앉고 나서 그 버스가 떠날 때까지 계속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 역시 어딘가를 향해 떠났다. 그 장면은 그렇게 끝났다.

미아가 기억하는 또 다른 장면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정류장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 주변의 다른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 반대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미아는, 몇 주 전에 봤던 그 연인들의 장면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 도로와 정류장은 조용했고, 그들은 그 조용함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서로에게 말했다. 그래봤자 그들의 목소리는 작았고, 또 그래봤자 주변은 너무 조용했다.

-이제 못 만나겠어.

-뭐?

여자는 몇 초 후에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

미아는 이 대목에서 일부러 버스가 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마침 완벽한 타이밍에 버스가 왔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의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라는 말에 뭐라고 대답했을지 알 수 없었다.


미아는 지금, 그때 그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순간 사강이 살짝 미소 지었다. 미아는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를 보며 미아는, 갑자기 자신 주위의 흐름이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심각하게 여겼던 이야기가 사실은 별 것 아닌 이야기였음을 깨달은 것처럼, 그 심각한 이야기를 감싸고 있던 거품 같은 게 터지면서 이 공간 안의, 그 일상의 소음이 들려왔다.

그는 사강에게 최대한 똑같은 미소를 지어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 미소를 짓는 건 꽤 어려웠다. 그는 아직 자신의 미소는 갇혀있다고, 저 사람처럼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누구는 아무렇지 않았고 누구는 그렇지 않았다. 누구는 자유롭고 누구는 갇혀있었으며, 누구는 평온했고 누구는 불안했다. 방금 자신이 짓고자 했던 그 힘든 미소가 그걸 보여줬다.

이런 식으로 이 소음들이 원래 있던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거겠지,라고 미아가 생각했다.


사강은 자신이 몇 달 전에 했던 거짓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재연을 떼어내기 위해 자신을 못된 사람으로 만들었다. 못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실제로 못된 짓을 해야 했다. 그 못된 짓으로 거짓말을 선택했다. 그는 재연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마음이 그쪽으로 가버렸으니 이제는 그를 만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못된 짓을 했다. 고작 몇 달 전일뿐이었지만 꽤 오래전으로 느껴질 만큼 현실감이 희미했다.

그런 거짓말을 한 건 재연에게도, 자신에게도 못된 짓이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너랑 있으면 가짜가 되는 느낌이야. 나는 진짜를 원해.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재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걸 선택했었지. 하지만 어느 쪽이 더 못된 짓이고 더 나은 짓인지가 다시 헷갈렸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미묘하게 못되게 굴었던 것과 그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자신 역시 그들에게, 심지어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던 몇 경험들을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 이 혼란들이 원래 있던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거겠지,라고 사강이 생각했다.


그들은 곧, 헤아려보자면 몇 분이나 서로에게 향해있던,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시선을 거뒀다. 갑자기 밖에서 비가 쏟아졌다. 언젠가부터 7월의 날씨는 이런 식이었다.

미아는 창밖을 잠깐 쳐다보다가 다시 책으로 주의를 가져왔다. 그리고 펜을 들어 노트에 단어를 정리하는 걸 다시 시작했다. 적당히 바삭한 종이의 질감과 특유의 향기가, 지금 그가 있는 곳의 잔잔한 소음과 어울렸다. 그는 갑자기 이 순간의 자신이 방금 전보다 더 나이 든, 아니, 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평화로웠다. 그는 펜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사강도 다시 노트북 속 멈춰져 있던 강의로 주의를 가져왔다. 그리고 강의를 다시 재생했다. 영상 속 강사의 강한 억양부터, 이어폰 틈으로 당당하게 들어오는 빗소리와 카페 안의 소리들, 주위의 편안한 색감들, 그리고 지금의 생각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지금 그가 가지고 있던 혼란스러움과 어울렸다. 그런데 그 덕분에 평화로웠다. 그는 아직 건드리지 않은 케이크를 쳐다보다가, 맨 위의 건조된 레몬 조각을 손으로 살짝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들고 친구의 이름을 찾아 메신저 창을 열었다.


그런데 사실, 낯설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에도   동안, 그들은 계속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도시 안에서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고.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많은  공유해오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단지 누구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것을. 그들이  도시에서 만나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한   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도, 방금 이 순간 각자의 혼란과 기억을 주고받아버린 우리의 관계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고.

잔잔한 소음으로 가득한 이 혼란스러운 도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복잡한 사람, 평온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를 이렇게 만들었다.


아,

어떻게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저 멀리서 수상하게 서정적인 천둥소리가 다가왔다.

이제 비는 계속 쏟아졌다.

짓궂고 따뜻한 이 도시 전체에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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