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의 순간
비가 며칠 동안 계속 내렸다.
8월은 폭우와 함께 시작되었다. 첫날의 폭우는 곧 잠잠해졌지만 곧 후텁지근한 비가 불안정하게도 다시 쏟아졌다. 중간중간 잠깐 멈췄다가, 또 쏟아졌다가, 다시 멈췄다. 열기가 식었다가, 다시 뜨거워졌다가, 잠깐 시원해지기까지 했다가, 또다시 열기가 되살아났다. 사람들은 집을 나서기 전 휴대폰 속 날씨 앱과 하늘과 긴 우산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 싸움을 하거나, 그런 것 없이 무조건 작은 우산을 챙겨 나가거나, 그런 것 없이 가볍고 얇은 방수 점퍼를 어깨에 걸쳐 나가거나, 아니면 그런 것 없이 항상 가볍게 빈 손으로 뛰어나갔다. 이 미친 날씨에 그런 식으로 맞섰다.
하지만 이런 날씨는 생각보다 더 끈질기게 이어졌고, 그제야 사람들은 그 절정으로 불안정한 대기 바로 아래에서, 자신들이 이 미친 날씨에 맞서는 게 아니라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휴대폰과 하늘을 쳐다보며, 우산과 점퍼를 챙기며,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표정으로 가볍게 나가며, 이제는 맞서지 않고 그저 적응하려 노력했다. 그 며칠 동안, 미아는 여전히 계속 처리 중이었다.
익숙한 밤이었다. 서점에서 나온 그는 가방을 가슴 앞으로 껴안고 빗속을 걸었다.
미지근한 빗줄기가 어깨, 머리, 팔, 얼굴, 몸 여기저기에 끊임없이 떨어졌다. 빗소리와 빗물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리가 귀를 파고들다 못해 이제는 원래 태초부터 계속되어 온 소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시끄러웠지만 좋았다. 자신의 시끄러운 머릿속이 덜 시끄럽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아는 곳을 걸어 다녔다. 사람들로 가득한 밝은 프랜차이즈 카페를 지나고, 대비되는 색깔의 빛으로 선명한 신호등을 보다, 차들로 복잡한 도로를 건너, 요란한 공산품들로 가득한 건너편의 큰 편의점을 바라보다, 조금 더 조용한 산책길을 향해 걸었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도로든 차들이 지나다니는 길이든, 온 땅바닥이 비로 젖어 온갖 조명 빛들을 비추고 있었다. 이 빛들은 밤에만 이런 모양을 드러냈다. 이렇게 비가 오면 일렁이면서 번져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인공적인 파란빛들이 온 동네에 번져갔다. 바닥 곳곳의 물웅덩이들에 미아의 발걸음 때문에 생긴 일렁임과 떨어지는 빗줄기 때문에 생기는 움직임이 합쳐졌다.
빗줄기는 가늘어질 생각이 없었다. 미아도 빗줄기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뭔가 찍을만한 게 눈에 보이면 그냥 사진을 찍어댈 생각뿐이었고, 그러고 나면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뭔가를 건져야 했다. 하지만 마땅한 장면이 없었다.
빗줄기가 잠깐 가늘어졌다. 모든 곳이 습기로 가득한 상태로, 차가운 먼지와 비 냄새가 진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그 상태로, 미아는 넓고 긴 산책길을 몇 바퀴 째 걷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눈앞의 큰 물웅덩이가 파랬다. 인위적으로 파란 물이 쉴 새 없이 일렁이다가 금세 조금 잔잔해졌다. 미아는 물웅덩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발을 넣으면 발목까지 젖을만한 깊이였다.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까운 곳에서 차들의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깜짝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사람들의 재촉과 짜증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바로 한 그는 자신의 한쪽 발이 방금 그 물웅덩이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발을 뺐다. 신발부터 양말까지 빗물로 축축했다. 무거웠다. 그 발로 땅을 밟자 찍찍 소리가 났다. 질척거렸다.
미아는 그 물웅덩이에 다른 쪽 발을 넣었다. 발을 넣은 채 가만히 있으니 웅덩이의 물이 잔잔해졌다. 물에 잠긴 신발이 묘하게 자유로워 보였다. 그는 그대로 서서, 자신의 발 위로도 찰랑이는 빗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있었다. 파란빛이 그 얼굴에 일렁였다. 그러다 그의 몸인지 옷인지 얼굴인지, 어딘가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물웅덩이를 더 일렁이게 만들었다. 물에 비친 얼굴을 어지럽게 흐트러뜨렸다.
그는 카메라로 뭔가를 찍으려 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자신의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관 앞에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모든 부분이 젖은 운동화가 또 다른 물웅덩이를 작게 만들고 있었다. 가지고 나가지 않은 우산은 구석에서 건조하게, 그 운동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 왜 그런 거라고?
방금 왜 그랬지?
마땅한 장면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미아는 허전해지더라도 이 의미 없는 이야기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만두지 않더라도 똑같이 마음은 아플 테니, 끝내는 게 정말 최악의 최악의 최악을 면할 방법일 것이었다. 그러려면 사과를 받아야 했다.
아니면 사과를 해야 하나?
뭐가 됐든 뭔가를 확실하게 해야 했다. 정확히는, 이제야 드디어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아니면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야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전자에 좀 더 가능성을 두었고 희망을 걸었다. 도무지 조절이 되지 않는 기대감이 미아의 코와 입을 막았다. 심장은 비에 젖은 듯 무거워졌다. 답답한 건지 떨리는 건지 헷갈렸다.
비가 그치면 조절할 수 있을까?
언제 그치는 거지?
이대로라면 홍수가 날 것 같았다.
*
미아는 다시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 대학생들의 동네로 향했다. 그리고 재연을 찾아갔다. 우산을 썼는데도 머리카락 끝과 옷 부분 부분이 젖었다.
재연은 미아를 보자마자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고는 미아를 안았다. 상처받은 큰 개를 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빗물이 자신의 옷에 배는 건 신경 쓰지 않았고, 자신이 안고 있는 사람이 왜 상처받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야 뭔가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미아의 상처를 달래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일단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미아와 사랑이라는 걸 시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이게 텅 빈 노력임을 알아차렸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생각을 하지 말아야 했다. 지금, 그는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는 미아를 더 꽉 안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모든 못남을 잊고, 텅 빈 노력이라는 걸 잠깐만이라도 던져 놓고 싶었다. 하지만 미아는 재연의 몸을 안지는 않은 상태로, 그냥 안긴 채 가만히 숨을 쉬고 있었다.
재연의 심장이 점점 떨려왔다. 몸속의 피가 더 빠르게 돌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상처받은 개가 진짜 상처받았다는 게 실감 났다. 계속 더 복잡해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생각했다. 일부러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 온 심장을 집중했다.
누가 이 정도로 상처받으랬나?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걸 즐기는 거 아니었냐고.
처음부터 그런 거였고, 너도 알고 있었어.
아닌 척하는 것뿐이잖아.
그는 미아가 쓸데없이 자신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백이면 백 다 알아봤던, 아니 알아봤다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이번에도 미아가 자신과 어떤 면에서 틀림없는 동족이라는 걸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는 몰랐지만 재연은, 아무도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수시로 간과했다. 다른 사람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미지의 공간 같은 게 있다는 걸 간과했다. 그래서 미아조차도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 덕분인지 때문인지, 자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알만했고, 어려워봤자였다. 그러나 상처받은 미아를 안은 몇 초 후부터 혈관에 피가 빠르게 도는 게 느껴지면서부터는, 그 자신감이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었다. 저번에 갑자기 미아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과 비슷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계속 고집스레 생각했다.
넌 나랑 비슷한 부류잖아, 나는 알아.
그게 아니면 이렇게 나를 찾아왔을 리 없으니까. 맞지?
조용히 있던 미아는 그대로 재연을 안은 채 말했다.
-우린 서로를 너무 좋아해. 우리는 서로를 안고 입 맞추고 그대로 있는 걸 좋아하지.
재연이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니까.
그러자 미아가 또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비웃는 것도 좋아해.
말에서 차분하게 파란 바람이 느껴졌다. 재연은 미아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고 미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랬나?
몸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마도 파란색일 거라고, 재연이 생각했다. 미아가 또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다치게 할 거야.
-우리가?
-이미 그러고 있는 걸지도 몰라.
재연은 미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동자만 보고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해. 네 말이 맞아. 저번에, 거짓말한 거 맞아.
되돌리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게.
미아는 자신이 분명 아직 재연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자신을 바라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온,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니면 알아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구는 그가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제야 사과하는 그가 안쓰럽게,
안쓰럽게?
미아가 문득 생각했다.
왜 안쓰럽지? 계속 생각했다.
-이미 안 그러고 있어.
재연이 계속 말했다. -정말이야.
그들은 계속 서로를 안고, 그들이 처음에 했던 생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걸 생각했다.
아
우린 결국
상처받고 후회하는 연인이 되고 말았네.
*
몇 시간 후 재연의 깔끔한 침대에서 미아가 눈을 떴다. 그리고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재연은 옆에 없었다. 미아는 아예 몸을 일으켜 집 안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