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의 순간
그들은 드디어 멈춰 섰다. 그들이 멈추게 된 날, 도시를 채우던 습기가 아주 살짝 빠져나갔다. 비가 멈췄고, 왔다 갔다 하며 불안정하게 굴던 것도 멈췄다.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던 범람의 불안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정말 최악의 날씨였어.
사강이 오늘도 카페 녘에 앉아 아빠와 오랜만의 통화를 하던 그 저녁,
-상태 최악이네.
재연이 자신의 집 화장실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계속 이렇게 되뇌던 그때,
미아가 집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서, 자신에게 말했다.
-내가 쓴 것들 중 최악의 이야기야.
시작부터 알 수 있었고, 그런데도 쓰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미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그 누가 막을 수 있었을까? 그걸 막을 수 있었던 건, 모든 게 불가항력으로 돌아가는 이 도시 안에서는, 아니 이 도시 바깥에서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작가인 그 자신만이 쓸 수 있었고 배우인 그 자신만이 공연할 수 있었으며, 관객인 그 자신만이 간간이, 혼자서 조용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들 이제 멈춰. 왜들 이래?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그래, 왜 그러는지 너희들도 모르겠지.
미아, 재연, 사강, 민, 그리고 이 도시 속 다른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다들 닮아있었다. 배우도 작가도 관객도 이 도시 안에 있는 한, 자신들이 확실하게 아는 게 없다는 것만 확실히 알았을 뿐, 그걸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그걸 누가 막을 수 있었을까?
이 도시는 일찌감치 그걸 알고는, 그걸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현명했다.
어차피 그들이 곧 스스로, 조금 나중에라도, 뭔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아는 여전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모서리 한 부분이 나뭇결을 따라 아주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는 그 균열에 엄지 손가락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여름도 그랬다.
현실적인 더운 바람이 창문으로 훅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작은 거실로 몇 걸음 걸었다. 그러고는 미지근한 거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는 이제 주변 역할이니 주인공 역할이니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현실에서 살자고 다짐했다. 역할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너와 나의 관계에만 신경 쓰자. 관계는 현실이잖아.
그러자 모든 게 재연과는 상관이 없어졌다. 갑자기 연애와 연인과 연기 같은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졌다. 괴로워서 감상적이고 클리셰로 가득한 극적인 이야기라니. 이제는 매력이 없었다. 지겨웠다. 며칠 전 그에게 남아있던 약간의 아쉬움은 이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자신이 그 이야기에, 현실을 사는 사람으로서 존재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이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었다.
인위적인 연기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그러니 이 이야기를 그만두는 게 더 이상 아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연기를 그만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거실 한가운데의 공허에서 깨어나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실타래들이 그제야 느껴졌다.
나는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
실타래들이 움직였다.
이제 멜로드라마에서 나갈래.
실타래들이 서로를 끌어당겼다.
최악을 써봤으니, 앞으로는 꽤 괜찮겠지.
최악의 최악의 최악을 면하고 싶다는 초조함도 없어졌다.
어쩌면 그냥 그대로 남아도 될 것이었다.
이제 이 도시는 환상과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가 머무는 장소 그 자체일 뿐이었다.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맘때의 저녁에만 볼 수 있는, 자신 주변의 것들에만 골몰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몇 분동안이나 잡아놓는, 마치 영화 같은 노을빛이 그의 작은 방 안으로도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때, 어김없이 이 도시에 하나둘, 익숙한 샴페인빛이 켜졌다. 그러더니 주황빛도 켜졌다. 미아는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가볍게 걸어 나갔다. 그러다 생각했다.
야, 근데 그게 어디가 ‘최악’이니?
같은 시각, 민은 혼자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겪은 여름은 최악이 아니었어.
오히려 그 반대였지.
*
모두의 말들이, 모두의 표정들이, 모두의 움직임들이,
그 모두의 순간들이 이 도시에 떠다녔다.
그중 몇 번의 순간들은 자연스레 공기에 섞였고,
몇 번의 순간들은 자연스레 사라졌고,
그렇게 느린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