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그들의 도시는 계속 외로운 사람들로 북적였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던 사람들은 더운 열기 덕분에 질문하기와 대답하기를 잠시 멈췄다.
사실은 나름 괜찮게 적응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질문과 대답은 은은하게 숨을 막다가 결국 폭발하는 더위에 비하면 전혀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러다 그 모든 게 덥고 추운, 습하고 건조한 문제와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질문과 대답 같은 걸 하지 않은 채로 그냥 그 도시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던 소수의 사람들 무리는 그렇게 수를 늘렸고, 그렇게 북적였다. 누가 원래 어디에 속해있었는지 모르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섞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의 저녁이 시작될 무렵, 그들은 온도와 습도가 아주 조금 내려가 있음을 느꼈다.
미아와 재연은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가 다시 아닌 상태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는 마치 그들이 연인이 되던 시기의 몇 장면들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파손된 필름에서 나온 사진들처럼 흐릿했다.
*
미아가 학교 정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재연은 그 옆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둘은 각자의 방향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걸음을 멈췄고, 몇 초 후에 서로를 멀찍이 떨어진 채 지나쳤다. 별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다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을 뿐, 그리고 그냥 지나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상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리고는 후회를 했다. 한쪽은 더 늦게 나올 걸, 이라며 후회했고, 한쪽은 눈을 마주칠 걸, 이라며 후회했다. 그렇게 그들은 후회하며 각자 갈 길을 계속 갔다.
다음 날 재연은 학교 울타리 바로 밖의 한 벤치 앞에 서서 허공에 대고 말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두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네가 우릴 망쳤어. 아니, 나를 망쳤어.
그는 땅을 보며 계속 말했다. -근데 시작은 나였던 것 같아.
그는 고개를 들었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미아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재연은 귀를 막고 있던 이어폰의 줄을 아래로 스르르 당겼다. 주변 소음이 들렸다. 그는 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뜨니 미아가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이번엔 맹세코, 연기한 게 아니었다.
재연이 카페 녹턴의 위층,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한 손에 작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계단을 걸어 내려왔고, 건물에서 나와 몇 걸음을 걸어 쓰레기봉투들이 모여있는 곳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았다. 그는 그 봉투를 꽤 오랫동안, 고작 자신이 버리기로 결정한 것들이 들어있는 쓰레기봉투를 바라보는 것 치고는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녹턴으로 시선을 잠깐 돌렸다가, 곧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몇 분 뒤, 그 옆을 지나던 누군가는 반투명 비닐봉지에 비친 누군가의 사진 조각을 보았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또 몇 분 뒤, 다른 건물에서 누군가가 적당한 크기의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그걸, 재연의 조각난 사진들을 포함해서 그가 버리기로 한 것들이 들어있는 그 작은 쓰레기봉투 앞에 무심하게 던졌다.
재연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차 앞 유리에 주황빛이 비쳤고, 그는 천천히 차를 멈췄다. 그리고 다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무도 바로 앞 횡단보도를 걷고 있지 않았다.
-날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근데 왜 그러는 거야?
몇 달 전에 미아가 이렇게 말했었다. 그들이 완전히 헤어지기 몇 시간 전이었다.
-이제야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면 믿겠어?
재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아의 얼굴을 보며, 미아가 자신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걸 짐작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자신이 옆으로 밀려 나가고, 그 자리에 미아가 서있는 걸 느꼈다.
미아가 서있는 장면. 아마도 그게, 자신을 통째로 집어삼켰던 이 도시가 다시 자신을 현실로 되돌려놓기 위해 만든 장면들 중 가장 첫 번째 장면이었을 거라고, 그가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몇 년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 도시가 만든 꿈, 영화, 소설. 그 장면들과 순간들. 그 이야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만 이렇게, 집어삼켜졌던 건가.
눈앞이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그가 생각에 빠지는 걸 경고라도 하듯 뒤에서 경적이 짧게 한 번 울렸고, 옆에 있던 차 안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재연의 얼굴을 구경하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재연은 그제야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다른 이들도 이렇게 집어삼켜진 적이 몇 번이고 있었다는 걸, 조금 나중에 알게 된다.
그는 시립미술관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빗방울이 돌에 툭툭 떨어지며 스며들었다. 미술관의 입구부터 그 주변이 돌에서 나는 그 서늘한 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몇 달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멋진 건물 앞에서 공기를 마시고 있던 그때의 자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 그렇게 건물 안에 들어갔고, 내부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고, 그러다 미아가 어느 사진 앞에 서있는 걸 발견했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했었다.
음. 다 내다 버렸죠. 근데 그게 도움이 된 걸까요?
그게 이해가 가요?
그때 재연은 예상치 못한 상처를 받은 순간부터 빠르게 끝나가던 그 관계의 본질을 본인은 이해할 수 없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왜 시작했지? 왜 그렇게 끝났지?
재연은 오늘 다시 그 똑같은 사진 앞에 섰다. 같은 전시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람이 꽤 북적거렸다. 재연은 휴대폰을 켜서 오늘의 날짜를 찾았다. 8월이 끝나기 딱 일주일 전이었다. 일주일의 기간이 주어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을 위한 건지는 몰랐다.
사람들이 그를 천천히 지나쳤다. 그동안 그는 가만히 서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옛날 배우의 장례식이 얼마나 따뜻했을지 상상하며, 이 장례식은 물론이고 심지어 지금 여기 이 미술관에서도 느껴지는 이 배우의 생명력과 자연스러움을 떠올리며, 분노와 슬픔보다는 고마움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이 장례식의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조용히 도취되어 가며, 그 배우를 추모했다. 그는 마치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서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득, 자신이 이 사진을 정말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했다. 그토록 바라봤던, 아니 바라봤다고 생각했던 이 사진을 오늘에서야 진짜로 보는 느낌이었다.
그럼 몇 달 전엔 이 앞에 서서 뭘 했던 건가.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부터 등에 달려있던 어떤 배우의 눈으로.
사람들이 그를 끊임없이, 천천히, 조용히 지나쳐갔다.
아,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어쩌면, 자신을 바라보던 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고, 재연은 생각했다.
재연은 미술관을 천천히 나왔다.
-나 그 영화 안 좋아해.
몇 달 전에 미아가 또 이렇게 말했었다. 그들이 완전히 헤어지기 몇 분 전이었다. 틈만 나면 같이 보던 영화를 이제 와서 싫어한다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알아.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이 대답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 영화를 볼 때 미아가 하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 여자는 그대로 떠났어야 했어.
-나라면, 남자가 계속 비를 맞으며 서있는 장면을 엔딩으로 하겠어.
미아는 이런 말들을 하면서도 계속 그 영화를 같이 봤다. 재연은 그 영화를 계속 재생했고,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그 영화를 봤다. 미아가 혼자 있으면 계속 재생하는 영화가 뭔지는 이제 알 수 없을 것이다. 재연은 자신이 틈만 나면 트는 그 영화조차 이제, 자신 안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어떤 영화를 틀어야 하지?
아니, 그것 말고도 뭔가가 사라져 있는 것 같았다.
미술관 입구 앞에서, 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몸의 모든 곳이 차분했지만 휴대폰을 든 한쪽 손만 덜덜 떨렸다. 뭔가의 금단 현상인 것 같았다. 뭐지? 담배는 아닌데. 사람들이 몇 명씩 간격을 두고 계속 들어왔다. 재연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옆으로 옆으로 비켜났다.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뭐 가져간 거 있어?
재연의 휴대폰 너머에서 미아가 대답했다. 미아는 이 말을 듣고는 자신이 찢어버린 사진들을 떠올렸다.
-그 사진들 찢어버렸어. 미안해.
가져간 건 아니었지만 재연에게서 빼앗았던 건 맞다고, 미아가 생각했다. -못 봤어?
재연이 말했다. -그건 알아. 사진 말고, 나한테 있었던 네 것 중에,
목소리에서 불안함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갑자기 그게 미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을 이렇게 달리 만들어버린 이유들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미안해하는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미아는 눈을 감고 머리를 털어내듯 흔들었다.
-존재감이 큰 게 있었나?
재연의 말이 끝나자 미아가 짧게 대답했다. -몰라.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미아가 입을 뗐다.
-이제 존재감이 커진 거겠지.
또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조용했다.
의외로 그 정적 안에서 다행히도, 두 사람이 각자 느끼고 있던 불안함이 점점 작아지고 작아졌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이 이제 침묵만이 어울리는 관계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렇게 자국만 남기고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재연이 말했다. -우리 이제 안 보는 거야?
미아가 말했다. -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