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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Oct 20. 2024

일곱 개의 장면들 _ 재현부 (2)



다섯 번째 장면.


미아가 먼저 통화 종료를 눌렀다. 그는 임시로 지어놓은 간이 터미널에서, 자신의 동네가 있는 도시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는 초저녁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미아는 휴대폰을 켜서 오늘의 날짜를 찾았다. 8월이 끝나기 딱 일주일 전이었다. 미아는 그 일주일을, 자신의 가족과 진짜 친구와 진짜 집이 있는 곳에서 보낼 것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이 도시에 섞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거슬리지 않았다. 환상과 두려움이라는 게 없어지자, 자신과 이 도시와의 관계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열렬했던 짝사랑은 끝났다. 이제 그는, 꽤 긴 기간 동안 이 도시를 짝사랑하던 걸 비로소 멈추고, 짧게 남은 몇 달 동안 이 도시에 발붙이고 머무는 걸 하기로 다짐했다. 다짐하는 순간, 자유로이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가 이 도시에 존재했기에,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그는 이제 곧, 아마도 너무나 빠르게 느껴질 세네 달만 지나면, 자신을 이 도시로 불러들였던 학교에서 벗어날 것이었다. 그러면 얼마든지 자신의 동네로, 또는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자유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모든 것이 나른한 이 여름날,

약 한 시간 전,

느리게 어스름해지는 저녁 하늘을 몇 번씩 쳐다보며 작은 빌라를 천천히 걸어 나오는 동안,

그는 자신이 지금껏 달고 다닌 이방인의 느낌이 이미 조금은 옅어져 있음을 느꼈다. 그걸 느낀 순간, 갑자기, 이 도시에 계속 남아있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자연스럽게 뭔가가 바뀔 수도 있는 거였어. 갑자기 바뀌는 게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이젠 전혀 이상하지도 않아.

순간 가로등이 켜졌다. 차들이 빵빵거렸다. 그러고 나서 잠깐 서있던 차들이 다시 출발했다. 미아는 자신이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둬 보자,라고 생각했던 몇 달 전을 떠올렸다. 그때는 내버려 둬 보자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는 것에 희열 같은 걸, 하지만 순수한 희열이라고 하기엔 불안함 같은 게 섞여있었지만 비슷하게 느껴졌던, 그런 희열을 느꼈다. 그는 지금 그때를 떠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정말 비슷한 것일 뿐이었어.

별안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가로등과 건물들과 차들의 빛이 축축한 도시에 더 번져갔다. 터미널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미아는 볼 안쪽을 이로 깨물고 괜히 헛기침을 했다. 씹힌 볼 안쪽의 자국 사이사이에 웃음기가 장난스럽게 휭휭 움직이며 걸려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아는 생각했다, 그걸 그냥 내버려 두기로. 그러자 코로 바람이 한번 피식, 나왔다.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곧 어깨가 웃음으로 흔들렸다. 순수한 즐거움이라고 하기엔 자조적인 감정이 섞여있었지만, 비슷하게 느껴졌다. 물론, 비슷하다는 게 똑같다는 말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똑같지 않고 비슷했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그게 중요했다.

  후에 웃음이 자연스레 멈췄고, 미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 그의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약 4개월 후면, 이곳에서의 생활을 천천히 마무리지을 것이다. 학교, 자주 가던 카페, 수시로 드나들던 큰 서점, 어떤 공원, 그 패스트푸드점, 공원, 산책길, 또 다른 카페, 제일 큰 카페, 어떤 대형마트, 그 편의점, 필름현상소, 시립미술관. 4년 동안 가본 이 도시 안의 모든 곳을 몇 번, 적어도 한 번은 혼자서 다시 갈 것이며, 지난여름의 기억을 아주 많이 떠올릴 것이다. 그리 많지 않은 짐을 차곡차곡 챙기고, 그중 대부분은 택배로 부치고, 나머지는 큰 가방에 남겨놓은 후 며칠을 더 있다가, 그 가방을 메고 지금처럼 빌라를 걸어 나와 그대로 터미널로 향할 것이다. 인공적인 빛들로 가득한 저녁의 길을 걷다 보면, 이윽고 차가운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여섯 번째 장면.


미아와 재연이 같은 시간,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재연은 진짜 의미 없었던 건 이 이야기가 아니라, 이 이야기 속, 이 도시 속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아는 후회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의미 없는 이야기는 이야기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전혀 의미 없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시간, 각자의 공간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며 턱을 괴었다.


알고 보니 이건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네.

연인들의 사랑은 '한여름 밤의 꿈'의 나무2 같은 역할이었던 거야.

중요하긴 했지만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지.

그게 중심이 아니었어.

그러면 뭐가 중심이었지?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뭘 했을까.


이 도시를 향한 사랑, 우리가 한 건 그거야.


수많은 사람들의 이 도시를 향한 사랑 이야기.

이 이야기에는 이 설명이 더 자연스럽다고, 그들은 여전히 같은 시간, 각자의 공간에서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의 창문으로 이 도시의 저녁을 바라보면서였다.




일곱 번째 장면.


재연은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걸어갔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혼자 멈춰 서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다 필름현상소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어쩌면 고민하는 시늉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든, 의미 없는 것이었다. 이젠 연기인지 진짜인지도, 미아를 그리워하는지 아닌지 헷갈렸다. 심지어 자신이 담배를 좋아하는지도 아닌지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미아가 완전히 떠났어.

그러자 사강이 말했다. -잘됐네.

-난 아직 너처럼 자유롭지 못하겠어.

재연의 말에 사강은, 자신이 이제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최근의 몇 달 동안, 생각해 보니 간과했던 부분이 아직까지도 존재하며, 그게 온전함을 느끼는 것에 방해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말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런 사람은 없어.

-그런 사람? 어떤 그런 사람?

-내가 너보다 더 좋아한다고 한 사람, 없는 사람이었다고.

둘 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이 대화가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거짓말했어?

-모르겠어. 그게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나 봐.

이 상황에서 재연은, 자신이 상처받은 과거보다 상처 준 과거가 더 떠오를 뿐이었다.

-난, 너 때문에 미아에게 똑같이 했는걸.

그러자 사강이 물었다. -정말?

재연은 방금 자신의 대답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생각했다. 저절로 나온 대사 같은 것일 뿐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버릇이 눌러앉아 있던 걸까. 재연이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그는 사강에게, 자신이 미아와 사랑에 빠지자마자 클리셰를 피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그에게 원래 있던 자연스러운 것들을 모두 부정했다고 말했다.

-다정함, 따뜻함, 솔직함, 자연스러운 멋. 그래야 내가 만들어온 게 방해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연스러웠던 게 맞나? 재연이 다시 말했다. -다정함, 따뜻함, 솔직함, 멋.

사강은 피식 웃었다. -멋?

재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버릇이 튀어나오지 않으려면 일단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사강은, 자신의 목에서 이상하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투가 나오는 걸 내버려 두었다. -네가 말하는 멋 같은 건, 겉으로만 떠돌고 있었을 뿐이야.

재연도 아주 오랜만에, 피식 웃었다.

사강이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만들어왔던 게 정확히 뭔데? 멋 같은 것 말고, 그 안에 있어야 할 것들 말이야.

재연은 자신의 방 안, 한쪽 벽지에 가만히 붙어있는 단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옅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런 건 없었던 거지?

사강은 재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잘됐네.


그들은 몇 초 후 동시에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들은 이제 이런 대화를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내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생각했다.

재연은 제자리에 무릎을 굽혀 길바닥에 담배 끝을 문질러 아주 희미하게 타던 불을 껐다. 그러고는 담배꽁초를 얇은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카페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미아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걸어갔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동네를 걸었다. 그렇게 하천을 따라 나있는 산책길에 들어섰다. 물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뭔가에 떠밀려서 속도가 빨라진 것처럼 그렇게 흘렀다. 그 위로 빗방울들이 시원하게 떨어졌다. 그는 귀에 있던 이어폰을 뺐다. 주위의 모든 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 대신 이 모든 소리가 귀 안을 가득 채웠다. 어떤 소리만 조용해졌을 뿐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온 동네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 걸었다. 그러다 바닥에 있던 물웅덩이 앞에서 멈칫했다. 몇 달 전의 그 도시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의 그 도시 안에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이 그때 그 도시 안의 자신과 그리 다를 것 없다고, 지금 이 물웅덩이에 비치는 자신의 일렁이는 실루엣을 보며 생각했다. 당연했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르지만, 그때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에 쌓여있었다. 그게 쌓인 결과가 지금이었다. 그래서 그 도시를 떠남과 동시에 몇 년 전의 예전처럼, 아니면 새로운 다른 사람이 되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 새롭진 않지만 분명 똑같지도 않은 상태. 그 도시나 이 도시나, 엄청나게 다를 건 없었다. 그리웠던 가족들은 하루이틀이 지나자 다시 평소처럼 문득문득 화나게 만들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게 했고, 솔직히 가족보다 더 그리웠던 진짜 친구 한 명은 자신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미아는 자신이 지난달에 떠나왔던 저 도시에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쁘다가 괜찮다가를 반복하던 자신을 생각했다.


그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러고는 뷰파인더로 그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대로 카메라를 들고 물웅덩이 속 자신을 찍었다.

찾아 돌아다니던 마땅한 장면이 이런 건가 봐.

그때 그 미술관 안에서 오래 보고 있던 그 사진이 떠올랐다. 그 배우가 떠올랐다. 많은 인물을 연기했고,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던 그 배우가 떠올랐다. 그다음엔 그간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여름이 떠올랐다. 너무 느리게 흘러가던 공기가 떠올랐다. 그 속에서 같이 떠돌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누가 그 여름을 이토록 늘여 놓았던 거야?


미아는,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고 있는, 이제는 제법 서늘한 빗방울들을 바라보았다.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나중에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최악이지만 사실은 최악은 아닌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개인적이지만 독특하진 않았고, 개인적으로는 극적이었지만 이야기로는 그리 극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미는 있을 것이다. 낭만에 가려져 흐릿하게 불확실한 멜로드라마도 어쩌다 한 번이면 괜찮을 것이다. 심지어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도와줄 수도.

그는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그 여름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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