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순간
새벽 다섯 시로부터 몇 시간이 더 흘렀다. 날이 완전히 밝았고, 주말 아침의 밝고 쨍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몇 시간의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한참 내다보았다. 집 앞의 카페 녘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드나들었다. 나올 때는 손에 뭐든 쥐어져 있었다. 그 옆의 빵집에도 사람들이 조금씩 드나들었고, 거리에 사람들이 있었고, 차 안에도, 신호등 앞에도, 가게 앞에도 있었다. 이 사람들의 표정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이 여름이 시작될 무렵, 자신도 저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민과 함께였을 때도 있었고, 혼자였을 때도 있었다. 녹턴을 드나들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평화로워 보였겠지만 사실은 불편한 마음으로 녘을 민과 함께 드나들었다. 가끔 혼자 드나들었다. 불편한 마음이었지만 평화로워서 죄책감이 느껴지던 몇 주 동안이었다. 지금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또 한 번 확인했다. 재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는 그가 몇 분 후에 나타난다 해도 없는 상태로 여겨질 것 같았다.
미아는 침대 바로 앞의 높은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 위에 자신이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한 장은 작은 액자에, 나머지 몇 장은 작은 봉투에 들어있었다. 미아는 그 작은 봉투 속의 사진 뭉치를 꺼내 하나하나 넘겨봤다. 재연은 이 모든 사진들 속에서 무표정이거나, 웃거나, 뒷모습이거나, 옆모습이거나, 앞모습이었다. 뭔가를 마시거나, 걷거나, 서있거나, 담배를 손에 쥐고 있거나, 기타를 안고 있거나, 미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아는 카메라를 든 자신이 그 사진들을 찍었던 여러 순간들의 느낌을 떠올리기 위해 사진들 하나하나에 더 길게 머물렀다.
떠올려지지 않았다. 그는 그때의 생각을 떠올려봤다.
찍어야겠어.
잘 나오네.
단순한 것들만 떠올랐다.
너는 이 도시를 닮았어.
또, 어떤 느낌이었더라?
또, 또, 무슨 생각이었지?
뭔가 더 중요한 걸 떠올려내야 말이 될 것 같았다. 저런 건 사진 바깥에 있는 말들일뿐이었다. 마음 안에 존재하지 않는 그저 단순한 반응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떠올리고 싶었다. 그게 뭔지는 몰랐다. 이 도시 같다는 건 이제 그리 거대한 부분 같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미아는 곧, 자신 안에서 이 도시를 향한 환상과 두려움 같은 게 이미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몇 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끝내 그동안 재연의 사진을 찍을 때 했어야 했던 중요한 생각을 떠올려 내지 못했지만, 자신이 이 관계를 시작한 것 자체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실수’라는 건 떠올려냈다.
수습할 수 있나?
수습할 수 있지.
그는 사진을 제자리에 두고 재연의 집을 나왔다. 그러다 다시 들어가, 사진들을 갈가리 찢었다. 그리고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아직 찢기지 않은 테이블 위 액자 안의 재연은 여전히 옛날 배우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진 속의 그 배우는 웃는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며 사진가의 시선을, 그리고 재연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재연도 미아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미아도 그걸 알았다. 재연은 점점 본인의 작품에서도, 주변인물에서도, 심지어 본인에게서도 밀려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옛날 배우는 적어도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심지어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활동하다 많은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아직 세상에 남아있기도 했다.
불쌍한 재연. 미아는 생각했다. 그들은 분명 달랐다. 연기라는 걸 하는 사람들이지만 달랐다. 이 배우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인물을 연기했고, 재연은 그의 세상 속에서 그 자신을 연기했다. 배우는 어떤 인물을 주체로서 연기했고, 재연은 자신을 객체로서 대했다. 하지만 문제는 객체로서 바라봤지만 객관적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렸을 것이다. 이 도시의 영향일까? 그럴만했다. 이곳은 수시로, 예고도 없이 사람들의 눈앞에 혼란의 막을 내리고는 이렇게 말하곤 하니까.
너 누구게?
하지만 미아는 생각했다. 지겨운 놈. 재연이 자신을 빙글빙글 세차게 도는 이 도시 안으로 끌어당겼고, 자신은 그 손을 잡고 혼란 속으로 들어갔다는 걸 생각했다. 환상과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혼란.
처음엔 그 혼란이 이 도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혼란 역시, 이 도시의 일부일 뿐이었다. 자신처럼 이 도시를 구성하며, 열심히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면, 재연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들어갔을 거라고, 미아가 쓰레기통 속 찢긴 사진들로 시선을 다시 옮기며 생각했다. 하필 우리가 그 장면 그 순간에 마주쳤을 뿐. 그리고 하필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는 너무나도 잘 맞았기 때문에, 같이 손을 잡고 이 여름과 어울리는 혼란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근데 그건, 다시 말하자면, 만들어진 거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 도시를 향한 환상과 두려움으로.
이제, 빠져나올 시간이야.
그는 액자 속 사진은 그대로 둔 채, 정말 완전히 재연의 집을 나왔다. 뜨거운 햇빛이 온 도시의 습기를 빠르게 말려주고 있었다. 미아는 그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신의 작은 집을 향해 느리게, 느리게 걸었다. 공기가 기분 좋게 바삭거렸다. 그 공기에서 그저 단순한 여름만 느껴졌다.
*
재연은 조용히 방황 중이었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이 도시 안에서 몇 시간 전, 미아가 재연 없는 재연의 집에서 사진을 찢을 때까지, 혼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생각했다. 미아를 사랑하기 시작하니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괜찮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랑스러운 로맨스 소설 같은.
어차피 그건 재연에게 딱히 매력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해로움은 있지만 그게 용서될 만큼 끌리는 매력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불안함이 없어야 했다. 일관성 없이 이리저리 흔들려도, 텅 빈 것 같은 허무함이 느껴져도 자신에 대한 불안함만큼은 없어야 했다. 이를테면, 미아와 함께 본 영화들 중에서 몇 개,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 같은.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었다. 매우 불안했다.
그는 이 의미 없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주체적인 사람처럼 연기했다. 주인공을 연기하느라, 자신이 스스로 만든 어떤 인물로 자신을 대한다는 걸, 진짜 자신은 어떤 드라마의, 영화의,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토록 강하게 자아라는 빛을 끊임없이 사방으로 반사하기만 하던 뭔가에 금이 가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의 주제가 바뀐 지 꽤 지난 이 상황에서, 금 간 틈 사이사이로 인공적인 빛이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조각들이 생겼다. 그는 지금 이렇게 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도시를 배회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관문을 나서던 미아를 떠올렸다.
안경을 건네던 사강을 떠올렸다.
서로를 밀어내던 친구를,
기어이 뭉쳐있던 사랑을 떠올렸다.
이 도시를 떠올렸다.
재연은 처음부터 이 도시를 사랑했다.
여기엔 그의 집이, 학교가, 미래가 있었다. 넓은 차도와 큰 건물들이, 어스름해질 무렵 켜지는 수많은 가로등의 불빛들이, 학생 때부터 거의 매일 가던 여러 개의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나란히 붙어있었고, 그는 그 카페들 앞의 차도와 인도 사이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지나다니는 차들과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 도시에 흡수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는 앞으로도 지금 있는 이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여기엔 그가 원하는 모든 장면들이 있었다. 넘쳐나진 않아도 충분했다.
바로 그 점이 좋았다. 과잉은 원하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넓거나 크거나 많거나 번쩍이면 그는 아마 상대적으로 좁고 작고 적고 바래 보일 것이다. 여기가 딱 좋았다. 학교 주위로 한정된 어느 범위 안에서 때가 되면 집을 옮겨 다니며 살고 있는 그는, 이 도시에 온 날부터 이곳이 자신의 도시임을 알았다. 그는 이 도시의 일부였다. 이 도시도 그의 일부였다. 이 도시는 그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그의 일상을 일 초도 빠짐없이 반영하는 필름이었다.
그는 이 도시가 자신을 빛내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확히 내 머리 위에 샴페인빛 핀조명을 동그랗게 떨어뜨려 줄 것이고, 그러면 그 빛이 서사를 만들어주겠지.
그러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러나, 지금은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도시를 처음 걸었을 때 느꼈던 자신감을 떠올리며, 지금 되찾아야 하는 게 그때의 그 자신감인지 뭔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뭔가를 알아버린 것 같은 지금은, 그걸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가늠해 볼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힘도 없었다. 방금 이 도시를 걷는 것에 힘을 다 쓴 느낌이었다. 그의 것이었던 도시가 이제는 그의 숨을 서서히 빨아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도시에 그동안 내가, 정말 존재했나?
다시 미아를 떠올렸다. 집에 가서 미아를 안고 싶었지만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재연은 미아가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것을, 그들이 서로를 비웃으며, 결국 서로를 죽일 거라는 말을 하던 걸 생각했다. 다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면서 싫어했다. 적어도 자신이 미아를 좋아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혼란스러워진 이 상황 때문에 미아를 싫어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느끼는 것만 봐도 그랬다. 아마 미아도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서로를 비웃었고, 이대로 있다가는 서로를 다치게 할 것이다. 그 말을 또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척을 하지 못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 버릴 것 같다고, 재연은 생각했다. 너무나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러고 있는 걸지도 몰라.
미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제야 사와 랑이 서로를 밀어냈다.
그러다 찢겨 나갔다. 재연이 공중에 두 손을 휘저었다. 잡히는 건 없었다. 흔한 여름 벌레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저 아침의 신선한 햇빛이 주위의 모든 빗방울들을 반짝이게 만드는 장면이 눈에 보일 뿐이었다.
조각들이 아른거렸다.
건조하게 찢긴 도시의 필름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