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의 순간
미아는 민과 만나기 시작했다.
민은 저번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미아와 같은 강의를 들었다. 그들은 원래 서로 알던 사이이긴 했으나, 아는 건 그저 서로의 존재 그 자체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도 꽤 크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존재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을 아는 상태로 남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이었다. 이런 도중에 관계라는 게 피어난다면, 그건 아주 드문 경우였다.
서로의 존재만을 아는 채 살았던 저번 학기가 끝나고 난 겨울방학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동네에 있는 프랜차이즈 옷가게에서 이른 아침마다 물류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로의 얼굴을 봤고, 자신이 아는 얼굴임을 확인했다. 동시에 속으로, 평소에 하던 것처럼 거리를 둘지 말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박스를 열고, 옷들을 옷걸이에 걸고, 그 옷들의 비닐을 쉴 새 없이 벗겨내고, 또 박스를 열어 비닐을 뜯어내고, 선반에 진열하고, 창고에 들어갈 옷들은 착착 정리하고, 가격표를 쉴 새 없이 붙여대고, 향수를 종류별로 진열하고, 그걸 함께 반복했다. 그 반복되는 단순 작업으로 일주일에 두 번 네 시간을 채우던 짧은 2개월짜리 아르바이트의 마지막 날에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처음 공유했다. 여기까진 거리를 좁힌 것도 넓힌 것도 아니었다. 아무 의미도 아니었다.
그렇게 얼굴과 이름만을 알고 난 이후 겨울방학이 끝나고 돌아온 새 학기, 같은 강의실에서 또 서로를 봤다. 미아와 민 둘 다 속으로는 반가워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는 시작하지 못했다. 둘 중 누군가의, 아니면 둘 다의 은근한 노력 덕분인지 눈이 한 번 마주쳤을 때, 웃는 얼굴로 서로를 기억한다는 표정만 한 번 나눴을 뿐이었다. 그들은 계속 각자가 학교에서 보일 수밖에 없는 꾸며진 사회적인 모습만 보며,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평소처럼,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6월 초에 다다랐을 때쯤, 팀과제를 같이 하게 되었다. 함께 과제를 하면서 우연히든 일부러든 눈을 마주치게 되는 순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늘어났다. 그렇게 미아와 민은 두 명의 팀원이 섞인 그 아주 작은 모임 안에서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과 생각보다 너무 많이 웃었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친해졌다. 넷은 어느새 적당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미아와 민은, 이 넷의 관계의 가까움과는 다른 느낌으로 서로를 가깝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리를 두는 것을 멈추고, 서로의 세상을 향해 몸의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가족과 진짜 친구와 익숙한 집과 풍경이 같은 동네에 있다는, 원래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둘 다 이 도시에 오기 전에, 그 소심하게 흐르는 하천을 따라 나있는 산책길을 거의 매일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들은 그렇게 종종 익숙한 것에 관한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오, 이제는 얼굴과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네.
어느새 민에게는 미아가 학교, 카페, 서점, 거리에 있는 게 너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동시에 또 너무 자주 안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상에 미아가 차지해야 하는 부분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본인이 미아와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이 미아와 자신 사이에 뭔가 작은 것이라도 생기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있었다.
*
미아는 재연의 뻔뻔함에 초조함을 느끼는 것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사람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상처받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런 게 바로, 영화나 책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감정 같은 건가 싶었다. 이상하게 그 생각은, 자신이 상처받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단칼에 이 관계를 끝내고 자하는 의지를 끌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이 관계의 끝이 어떨지 기대되기까지 했고, 재연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이 통속극의 주변인물로서 끝까지 역할을 다하고 싶었다. 어떻게 끝날 지 모르는 이 이야기를 중간에 별안간 나와버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정말 영화나 책 속에 사는 인물이 아니라, 이 현실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이야기 속에 있기에, 복잡하거나 혼란스러운 게 매력이 되는 것이었다. 그게 그들 일상의 재미이며, 멋이었다.
근데 나는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잖아.
멜로드라마적 극 속에서가 아닌 현실에서의 이런 위기는, 그저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매력과 멋을 차츰 빼나 갈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자신의 이 상처를 자신 스스로와 재연 둘 중 누가 더 깊이 찌르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에 너무 많은 시간과 힘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어쨌거나 누군가가 깊숙이 찌르고 있는 중인 건 확실했다. 아마도, 칼 같은 걸로.
누가 먼저 뺄 거야?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빼자.
이런 식의 대화라도 했어야 했다. 아무리 거짓말쟁이들이라도.
그렇게 신경전, 체념과 회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상태가 조용히 전개되고 있던 때, 민과의 관계 변화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는 다정했고, 가식적이지 않았으며, 담배를 피우며 길을 걷다가 중간중간 멈춰서 침을 뱉지도 않았다. 민과 함께 있으면 영화와 책 속 인물들이 겪는 감정들보다도, 그냥 현실을 사는 대학생이 겪는 감정들을 느끼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보통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민을 떠올리며, 미아가 생각했다.
미아도 민도, 이미 이 도시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미아는 이번 여름동안 빠르게, 민은 세 번의 여름이 지날동안 서서히. 어쨌든 그들은 이제 이곳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각자의 가족과 옛날부터 살던 진짜 집과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 한두 명이 있는 그들의 동네와는 달리 아직 이곳과 그들의 사이가 빈틈없이 붙어있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미아가 어느 날 문득 그 거리가 좁아져 있음을 발견할 만큼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면, 민은 서서히 그 거리를 자신이 좁히고 있음을 인식하고 느끼며 새로운 일상의 공간들을 채워왔다. 새로운 습관들과 다짐들. 매일 걸어 다닐 넓은 길과 매일 뛸 새로운 산책길. 몇 명의 새로운 친구들과 매 학기마다 그대로인 한두 명의 이웃들. 이제는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는 사이가 된 몇 명과 얕게 스쳐 지나간 두 명의 전 연인들. 이런 게,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비어있던 공간들을 채워주었다. 그는 대학생들의 동네에 살았는데, 그중에서도 끝쪽에 있는 빌라에 살았다. 동네와 그 바깥의 경계에 있는 길, 그곳에 살며 그는 적당히 느린 속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써나가리라 다짐했고, 그렇게 했다. 그가 만든 몇 명의 친구들이 그걸 증언해 줄 수 있었고, 그 친구들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민은 이 도시에 올 때, 자신이 몇 년 후에는 어디에서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사는 몇 년 동안은 최대한 ‘잘’ 살고 가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이곳을 두 번째 집으로 여기리라. 이런 것들은 당연히 노력이었다. 그도 타고난 ‘어디든 잘 적응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이 도시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고, 그전에, 그가 이 도시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미아와 같은 곳에서 온 이방인인 민은 이 도시에 잘 섞여있었다. 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미아가 보기에도, 그는 이곳과 어울렸다. 가끔 자신의 집이 있는 동네의 카페와 도서관이 그리워 주말을 기다리기도 하고, 다시 이 도시의 카페와 도서관을 습관처럼 드나들며 이곳에 잘 섞여있었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다. 부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