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의 순간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미아와 재연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멀리서 보면 보통의 일상적인 대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일상적인 것이란 뭘까. 아마도 미아가 이 도시에서 찾지 못한 것이며, 재연이 갑자기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그 무엇일 것이었다. 멜로드라마적 순간. 그들은 그걸 잃어감과 동시에 붙잡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바로 이 특징만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고, 이제는 완전히 여름으로 접어든 그날의 습도 높은 한낮의 기운이, 그들의 우왕좌왕하는 머릿속을 조금은 나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게, 이 멜로드라마적 극의 순간을 보통의 일상적인 순간처럼 보이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자체는 복잡하지만 모든 장면은 잔잔하고 평화로운 영화 같았다. 심지어 초록의 나무들과 풀들이 그들의 주위에서 시원하게 산들거렸다. 재연이 미아에게, 나 그 사람이랑 이제 정말 끝났어,라고 말한 직후였다. 그들의 대화는 그들이 생각해도 연극 같았다.
-저번에 네가 말했잖아. 애인이 다른 사람이랑 사랑에 빠지는 게 이해가 가냐고. 사실 너는 엄청나게 잘 이해하고 있었겠네. 네가 지금 그러고 있으니까.
미아의 말에 재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뭔가를 생각해 보는 듯, 손가락을 턱에 대고 밑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만 있었다. 미아가 계속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래서 사실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솔직히, 방심하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다.
-다시 좋아하게 되었던 거야, 그 사람을? 아니면, 네가 여전히 그 사람의 애인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던 건데 나만 몰랐던 거야?
몇 초의 정적 후에 재연이 말했다.
-그것도 맞는데, 그 사람이 여전히 내 애인이었고 네가 다른 사람이었다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미아는 재연이 자신의 문장에서 내용이 아닌 구조를 반박하는 것에,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지금까지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에 놀라 눈을 살짝 찡그린 채 말했다.
-같은 말이잖아.
이게 대체 무슨 대화야?
미아가 생각했다. 재연은 자신을 누군가가 보는 스크린, 무대, 책 속에 놓고 보길 바랐다. 모든 것, 특히 관계에서 그는 자신이 주체적이며 이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항상 자신을 한 인물, 객체로 바라보았다. 미아는, 이걸 지금 이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게 재연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가 붕 떠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재연은 어느새 미아에게서 뒤돌아선 상태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런가? 아니, 살짝 달라. 그리고 다시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던 거야.
미아는 입을 다물고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재연이 계속 말했다.
-그래. 비슷한 말이긴 해. 나는 어떤 말이 더 자연스러운지를 말하는 거야.
지금 재연은 지금까지 미아와 만나며 했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아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의 몇 분이, 재연을 더 잘 설명했다. 그래서 미아는 재연을 좋아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가라앉은 생각을 하면서도, 재연의 지금 모습을 조금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은근히 내세우던 여유로움 같은 게 갑자기 사라져 가는 게 보이는 듯했다. 누군가 그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미아가 줄곧 느껴왔던 불안한 이끌림 같은 게 재연에게서도 느껴졌다.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를 슬금슬금 잡아당겼던 그 누군가의 힘.
어쨌든 -이 최악의 이야기의 작가로서 말하자면- 이제 현실은, 사강의 입장에서 재연은 더 이상 애인이 아니었고, 그러니 당연히 사강에게 미아는 아무도 아니었다. 재연 또한 이제는 전애인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무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아는 그 사실을 몰랐고, 재연은 모르는 척했다. 그들은 아직도 사강이 이 이야기 안에 있다고 믿었다. 미아는 재연의 말로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재연은, 자신이 혼자 쓰고 있는 이 이야기에서는 그렇게 진행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일단 사강의 말 위에 희미하고 뿌연 뭔가를 덧칠해 버렸다. 상황이 괜찮아지면 그 뭔가를 걷어내고 신경이 쓰이지 않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쨌든 이 이야기 속의 자신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 중심에 서있으면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미아와 진짜 연인이 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이었다. 몇 달 동안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여전히 사와 랑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있으니, 잘 될 것이다. 미아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좋아하게 될 사람이었다. 아니, 상처받은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도 미아를 좋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의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다 망칠 거야.
그래도 괜찮나?
나조차도 망칠 텐데.
재연이 몸을 돌리고 미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어쨌든, 이젠 아니야.
자신을 바라보는 미아의 복잡한 눈동자를 보자, 어떤 확신이 들었다.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어. 그 사람과는 이제 정말 끝났다고. 다시 너한테 돌아갈게. 이제 그럴 일 없어.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심지어 무엇을 향한 확신인지도 몰랐다. 그냥 그렇게 확신에 차야 할 순서일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단 잡아당겨지는 대로, 자신 있게 끌려가야 해.
하지만 미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몇 주만 좀 거리를 두자.
재연이 약간 멈칫했다. 흔들리는 두 눈동자 위로 갈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샴페인색으로 아주 잠깐동안 반짝였다. 미아는 그 샴페인색을 바라보며 이미 정해져 있는 걸 말하듯 덤덤하게 또 말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
재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재연이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미아도, 미아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재연도 이 순간을 은근히 기다려오며 준비하다가, 드디어 이 순간을 맞이하고는 암묵적으로 동시에, 연기를 시작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각자 준비했던 게 그대로 전개된 건지는, 그들 자신들도 몰랐다.
*
며칠 후, 카페 녘 앞에서 재연과 사강이 만났다. 재연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사강이 카페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바깥에 서서 각자 팔짱을 낀 자세로 삐딱하게 서서 서로를 쳐다봤고, 사강은 재연에게 자신의 차에 떨어져 있던 안경을 건넸다. 그러면서 건조하게 말했다. 이미 그는 몇 분 전까지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길 참이었다.
-뭐 좀 놓고 다니지 마.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강의 말투에서 짜증이나 화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건조했다.
재연은 자신도 그렇게 말하려 노력하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누가 들어도 화난 것처럼 들려서 더 당황했다.
-그럼 그냥 버리지 그랬어.
-에이, 그걸 왜 버리니.
-이렇게 또 봐야 하잖아.
사강은 재연을 쳐다보며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네 안경은 잘못이 없으니까.
-그래, 미안. 고마워.
이 건조하고 짧은 대화에서 재연은, 사강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깃털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강에게서 시선을 떼고, 일부러 먼 곳을-사실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산뜻했었나?
-뭐?
-네가 이렇게 뭐든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냐고.
재연은 이제 차마, 사강이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는 걸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척하고 덧칠해 놓은 희미하고 뿌연 뭔가를 그냥 걷어내 버렸다. 어차피 그 역시 사강을 사랑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사강이 말했던 것처럼 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