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가든 Sep 19. 2024

열두 개의 순간들, 셋 (2)

거짓의 순간



이날로부터 이틀 뒤 재연은 미아에게, 너와 나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로 향해 있는지 모를 죄책감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상대를 갈구하면서도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상처를 받는 걸 택해. 거기에 이상한 희열이 있거든. 아니야?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이야. 나는 그게 좋아. 우리가 사랑과 사람을 갈구한다는 게 자랑스러워. 인간적이잖아.

미아는 이 말의 그 어느 부분도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속으로 말했다. 난 그렇지 않아.

아무런 반응 없이 식탁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미아를 바라보며 재연은, 미아가 속으로 난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아의 속마음을 끄집어내서 논쟁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저 속으로 말했다. 너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나는 널 알아.

두 거짓말쟁이는 그렇게 속으로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도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음’으로 그 대화의 끝을 각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그 생각에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었다.


몇 시간 후, 미아는 자신의 작은 공간에 돌아와 가방을 구석에 던져놓고 테이블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 그 속마음을 들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었고,

-그게 왜 좋아?

그러면 재연은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거니까.

미아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너 같은 사람은 많을 거야. 내가 아닐 뿐이지.

재연이 원하는 건 사랑과 사람을 갈구하는 면에서 미아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것이며, 그 말은 즉 그게 꼭 미아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재연은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 오히려 그걸 즐기는 사람. 그래서 상처에 강한 사람. 미아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재연처럼 되고 싶었다. 상처를 즐겨서 오히려 상처에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바꿀 순 없었다. 상처는 즐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바뀌는 것보다, 그냥 빨리 상처받고 끝내는 게 나을 거야. 그래서 그러길 바랐다.

이런 게 주변인의 역할인거지?


그는 이 모든 상상을 하다가 움찔했다. 자신이 재연의 마음속 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에 흠칫, 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대화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상처 주는 걸 너무 열심히 하고 있었다.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행위. 이게 그저 재밋거리가 아니라 정신문제로 이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미아가 생각했다.

어쩌면 재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미아는 어쩌면 빨리 상처를 받고 끝내길 바라는 사람처럼, 상처를 받으며 그와 헤어지는 상상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는 자신이 처음에 재연과 이런 관계가 될 걸 예상했고, 그걸 예상하면서도 그를 좋아했고, 그가 다가오자 운명 같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런 모양의 관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설레기까지 했다는 것도. 그러니까, 최악의 이야기를 쓰게 될 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펜을 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는 뭔가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벌써부터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누군가는 이런 걸 낭만이라고 부르겠지.

그 누군가 중 하나가 나인가?

시작부터 엉망이었기에 과정이 깔끔할 리 없었다. 그러면 끝이 어떻든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자신을 밀어내더니 갑자기 빨아들이기 시작하던 이 도시가 첫 문제였던 것 같다고, 미아는 생각 좀 그만하자고 생각했다.


오, 이제 제발 생각은 그만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 중에는 어떻게든 일어나야만 하는,

그런 문제도 존재한다고.


미아의 머릿속에서 생과 각이 서로를 끌어당겼다. 분명 자연스럽게 시작했는데 단호하게 닫혀버렸다. 수상한 표정을 한 설렘은 아직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곧 자신이 그 표정을 따라 하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


며칠이 지났다. 미아는 재연과 함께 있는 순간마다 이 도시의 밤과 전경과 건물과 자동차와 불빛에 물들어갔고, 여전히 불편하지만 이상하게 그 불편함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그 불빛들을 즐겼다. 눈부셨지만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맞설만한 정도였다. 그는 지금이 이 도시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단계라고 여겼다. 환한 불빛들에 자신을 가두듯 압박하다가 마지막에,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거두고 한가운데를 내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시험 대상이 되기까지도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 이제야 나를 아는 척해주는구나?

그리고 어느 날, 재연과 카페 녹턴에서 나와 한 번 세게 껴안은 뒤 혼자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는 갑자기 희열이 느껴질 정도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자신이 이 넓고 높은 도시의 따뜻한 심장 한가운데를 몇 번이고 거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가벼운 발이 닿는 곳마다 땅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를 딛고 위로 떠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예 이 도시 전체를 딛고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불안하게 거슬리던 그 설렘이 바로 이런 걸 향해 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가 원하던 방향으로 가고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눈이 부셔도 더욱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둑한 부분에서 눈을 감은 셈이었다.

재연은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고도 평소처럼 빠르게 잊고 마는 상태로, 미아는 그 문제를 알아채고도 빠져나가지 않은 채로,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하는 거짓말과 말하지 않는 속마음 같은 건 본능적으로 알아내면서도 티 내지 않았고, 서로가 그걸 티 내지 않는다는 걸 알아내면서도 티 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써놓은 이야기 그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듯이, 그래야 이 흥미로운 이 관계가 그대로 흥미로운 채로 남아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그렇게 자신을 보이지 않는 흐름에 내맡겼다. 최악의 이야기가 되겠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해하면서도, 계속 이 이야기를 주시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떤 사람은 이걸 신경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테고, 다른 사람은 이걸 체념이나 회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오히려 더 쉽게, 사랑하지 않는 것, 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신경전을 벌이며, 체념 또는 회피를 한 상태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상태로 그들 자신을 지켜보았다. 회의 같은 걸 하지 않았고 대책 같은 걸 세우지 않았다. 그렇게 내버려 두었고, 이 이야기는 그래서 계속 흐른 것뿐이었다. 너무 느리게 흘렀다. 그렇게 느껴졌다. 휘잉, 휘이잉.


그런데 아마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이 도시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전 05화 열두 개의 순간들, 셋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