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순간
어느 날 재연은 사강에게, 너와 나는 다르다고 말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한 미아와의 짧은 대화를 한 날부터 하루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고, 그 대화는 이미 재연의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그들은 중고 서점이 있는 건물의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에스컬레이터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난 너한테 상처받은 마음에 지금 이 사람을 만나버린 거야. 네가 그런 걸 알아? 넌 남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지. 오직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걸 쫒는다는 핑계로. 그런 네가 상처받은 사람의 심리를 알 수가 없겠지. 우린 참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지?
사강은 이 말을 들으며, 정말 모른다는 표정을 하곤 어깨를 한 번 으쓱 올리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보며 재연은, 이런 여자와 다시는 연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면서도 사강과 다시 이렇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강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이런 만남이 재미있기 때문인 것 같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게 사랑일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감정들이 존재하는데, 그마저도 다 모양이 다르잖아?
그러면서 그는 또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 친과 구가 서로를 밀어내던 것처럼, 사와 랑이 서로를 밀어내고 갈라질 순간을 기대하며 기다렸다.
사랑, 사랑. 그들은 재연을 놀리듯 꼭 붙어있었다. 어떤 낭만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음에도, 두 음절은 그냥 그렇게 그대로 자연스럽게 발음될 뿐 서로를 밀어내거나 갈라지지 않았다.
그때 사강이 뒤쪽으로 몸을 살짝 돌리고는 말했다.
-그러면 지금 이게 다 복수심에서 비롯된 거라는 소리야?
재연은 눈으로는 바로 앞의 사강을 보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그렇게 곱씹으며 계속 생각했다. 이쯤이면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사강은 자신의 바로 뒤에서, 허리에 한 손을,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 부분에 다른 한 손을 올리고는 바닥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는 재연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다 다시 몸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를 향한 복수심인데?
그제야 재연이 고개를 들고, 대충 말을 던지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소리야.
재연아, 이게 뭐 하는 거냐.
재연은 자신의 찡그린 얼굴 앞에서 파리를 쫓듯 한 손을 한 번 휘익 젓고는, 계속 하고 있던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 영향으로,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를 의미 없이 꽤 오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이제는 의미 없게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불신 같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말에 얼마나 진심을 담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저 한 단어일 뿐.
누구나 쉽게 많이 생각할 수 있는 말이잖아.
그럼 쉽게 많이 내뱉을 수도 있겠지.
거기에 더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그걸 스스로 정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볍게 여기는 것을 택해 왔다는 걸 생각해 냈다. 그에게 따뜻한 단어들은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강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났기에 연인 관계가 깨졌다는 걸, 나름 재미있는 사건 정도로 여길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강을 원래도 그리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어쨌든 이런 복잡한 방식으로 재연의 진심 역시 존재했으니, 그가 거짓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진실한 부분들이 그의 말과 태도 곳곳에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다 거짓일 수 있겠어.
다만 그 진심이 자신만의 진실이라는 게 걸렸고, 그걸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객관적일 수 있겠냐고.
봤지, 난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야.
적어도 이 도시는 그걸 알아.
그는 이 도시를 믿었다.
그때, 아마도 재연은 이 장면에 사강 역시 등장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는 듯 사강이 잠깐의 정적을 깨고 말했다. 그들이 막 올라온 1층, 그 아무도 없는 공간이 그의 목소리로 울렸다.
-너는, 너 스스로가 되길 바라는 그 매력적인 주인공은 못 돼. 왠 줄 알아?
재연이 사강을 쳐다봤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사강은, 그런 재연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널 알게 되면, 네가 사실은 비겁하다는 것도 알게 될 테니까. 되게 잘 쓰인 연극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는 먹히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