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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Sep 15. 2024

열두 개의 순간들, 둘

발현의 순간

2. 발현의 순간



그러나 생각이란 건 조절할 수 없었고,

이런 생각이 이유 없이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


미아가 이 도시에 왔을 때에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아주 작고 오래된 시외버스터미널이 파헤쳐지고 이젠 그저 좁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동안,

대신 그로부터 고작 1km쯤 떨어진 넓은 빈 공간에 4년 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던 새 터미널이 어느덧 완성되어 가는 동안,

그러니까 미아와 재연이 도시를 함께 돌아다니기 시작하던 그 5월 한 달 동안,


재연은 전연인 사강을 만났다. 그들 자신도 몰랐던 건데, 그들은 아직 완전히 헤어지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 애매한 상태를 질질 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재연이 자꾸 먼저 사강을 찾았다. 미아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어제? 친구 만나러 잠깐. 너는 모르는 애야. 취했더라고.

그는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에게도 자신의 이 거짓말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시도를 했고, 그 시도는 쉽게 먹혀들어갔으며, 그렇게 사강을 전연인 또는 애매한 관계 속 비밀스러운 연인이 아니라 ‘친구’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가장이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계속 그렇게 말했다.


이런 관계를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어.

‘친구’가 가장 적당하잖아.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너무 자주 해서 친구라는 단어가 순간 구조적으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5월이 중순을 넘어 끝으로 향하는 시기의 어느 날, 갑자기 겨우 두 개일뿐인 음절이 서로를 밀어냈다. 친구, 친구, 친구. 친구? 마치 서로 붙어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밀어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이 단어를 뜯어보던 몇 분의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어쩌면 완벽할 수 있었던 자신을 속이는 일에 살짝 실패했다. 가장을 들키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이런 관계를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냐고.

‘친구’밖에 더 있어?


이런 말을 좀 덜 했어야 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가장을 들킨 이상, 일단 자신의 말을 그냥 중간 어디쯤에 놓기로 했다. 거짓과 진실이 섞여있지만 그래도 진실에 가까운, 그 애매한 위치에. 그건 ‘친구 같은 관계’였다. 완전한 진실은 아니지만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었다. ‘같은’은 그를 일시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주위로 ‘같은’의 보호막을 치며 그가 혼잣말을 했다.

-벌써 더워. 왜 이렇게 빨리 시작했지? 이건 아닌데.


한편 미아는 이게, 그러니까 이제 재연이 스스로에게 너무 자주 말한 나머지 정말 완전한 거짓말까지는 아니라고 믿고 있는 이 애매하게 섞인 말이, 완전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거짓말을 확신함과 동시에, 자신이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왠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자신이 이 관계를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게, 재연의 거짓말보다도 더 큰 의문이었다. 게다가 분명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이런 상황이 빨리 벌어졌기 때문에, 이 불안하고 피곤한 생각들 역시 빨리 밀려오고 있다는 것에 살짝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 역시 혼잣말을 했다.

-벌써 끝이 보여. 왜 이렇게 빨리 시작했지? 이건 아닌데.


그러다 시작한 게 아니라 끝나가는 거라며, 미아는 생각을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그다음 단계, 즉 벌써 끝나가는 이 관계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는 단계를 일찍 대비하지 않은 것에 자신을 원망했다. 낯설고 매력적인 것에 한순간 끌린 게 잘못이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좀, 경계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은 재연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애초에 시작을 피하기엔 그들의 만남은 너무 완벽했다. 게다가 사실 그는, 처음 겪어보는 극적인 상황에 잠깐 설레기까지 했다는 걸 자신에게까지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뭔가, 또 다른 극적인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어.


재연은 이 관계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다음 장면을 고민했다. 벌써 미아와의 이야기를 끝내기엔 아쉬웠다. 사실 그는, 주인공으로서 처음 해보는 못된 역할에 살짝 들뜨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가 미아에게, 정확히 말하면 이 이야기 자체에 끌린 이유가 그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선을 넘지 않는 정도의 해로움은, 가끔 이렇게 사람들을 잡아끌었다. 위태롭지만 그만큼 극적이기에, 오히려 매력적이고 중독적이었다.

그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 더위 때문이야. 여름이란.


어쨌든 이 거짓말을 한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재연은 미아가 자신의 말을 거짓이라고 믿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미아도 재연이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 모르는 척했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잘 맞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었다.




*


하지만, 이 도시 속의 젊은 두 거짓말쟁이의 일상에는 당연하게도, 너무나 진실인 것도 섞여있었다.

-나는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아.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거겠지.

재연이 자신을 속이려고 하다 어느 귀퉁이에서 조금은 실패한 후, 그리고 미아가 자신이 당황한 그 상태에 조금은 익숙해진 후의 어느 날, 재연이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을,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엔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문제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외로운 이 생활에, 누군가를 상처주곤 하는 일상에, 그래서 그 누군가가 또 자신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그 패턴에. 그러니 결국 상처를 주는 건 돌고 돌아 자신부터 시작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미아가 노트북을 두드리며 말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재연의 말이 바로 날아왔다.

-그 자체가 문제라고,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것.

미아가 질세라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그 자체가 문제라는 걸 알지만 고칠 생각은 없었다. 재연은 그 생각을 아예 시작하지조차 않았다. 그냥, 그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고만 있었다. 그는 그렇게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계속 관계 안에서, 상처들 안에서, 이 도시 안에서 먼지처럼 돌고 돌았다. 사실 나름 재미있었다. 휭, 휭.


-생각해 본 적 없어.

재연이 말했다. 정말 신경 쓰지 않는 말투였다. 미아는 이 대화가 갑자기 시작되던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노트북 키보드를 아무렇게나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몇 초 후 이 짧고도 뜬금없던 대화가 갑자기 끝나가는 걸 느끼며 그제야 그걸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화면을 쳐다봤다. 하얀 화면 속 의미 없는 글자들이 차라리 더 말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방금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마지막 말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너무나 진심이었다.

-이제부터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재연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하얀색 티셔츠를 주워 입으며 대답했다. -그래.

누가 알았겠냐마는, 그리고 알았어도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연의 이 짧은 대답도 그 순간에는 정말 진심이었다. 다만 자신이 듣기에도 진심이라곤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어쩌겠어.

재연이 생각했다. 이번에는 죄책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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