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순간
그들은 서로를 떠났다.
몇 번의 순간들이 있었고,
그 모든 순간들은 이 도시에 떠다녔다.
*
미아는 자신의 진짜 집이 있는 자신의 동네를 사랑했다. 거기엔 시도 때도 없이 미워해도 싫어하지는 않는 가족과, 진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친구 한 명과, 익숙한 풍경들이 있었다. 수시로 가는 영화관이, 도서관이, 좁은 면적에 비해 많은 카페가, 작고 큰 몇 개의 공원이, 친근한 아파트 단지가, 소심하게 흐르는 하천이 있었고, 미아는 그 하천 옆으로 난 산책길을 저녁마다 걷고 뛰었다.
그는 지금 있는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엔 가족도 친구도 없었고, 익숙한 풍경도 없었다. 이곳에서 이제 약 4년 정도를 살며 학교를 다녔지만 이곳의 풍경을 아직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계속 이방인이었다. 학교에서는 수업만 들었고, 그날의 수업을 다 듣고 나면 곧바로 그가 숙소,라고 칭하는 자신의 작은 집이 있는 빌라로 걸어갔지만 그 안에서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뛰쳐나오고 싶었다. 좁은 기숙사 방만큼이나 좁았던 첫 번째,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덜 좁았던 두 번째 집보다는 더 넓은 집이었지만, 이상하게 여전히 공간이 없었다. 사물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사람도 본인 하나뿐인데도 답답했다.
그래서 카페에, 도서관에, 서점에 갔다. 그는 수업 사이 뜨는 시간에도 학교 밖으로 최대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정문으로 빠르게 걸어 나와 긴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 큰 도로변에 있는 자주 가는 큰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조금 안쪽에 있는 마트에 가거나, 조금 더 걸으면 나오는 대형서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학교에서의 일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시간을 빈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무언가로 채워 넣기 위해 노력했다. 이유 없이 피곤해도 어떻게든 정신을 깨워서 읽어야 할 책을 읽었고, 인터넷에 북마크로 저장해 둔 누군가의 인터뷰나 짧은 기사나 짧은 에세이를 읽었고, 사야 할 것들을 샀고, 해야 할 공부를 했고, 산책길을 걸어 다녔고, 마트를 구경했고, 과제를 했다. 이 모든 게, 학교와 학교 주변에서 하는 거의 모든 게 보통의 일상이 아닌,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으로 느껴졌다.
이 도시를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머물고 싶을 만큼 멋진 곳이라며, 자신이 이곳에 사는 걸 꽤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저 아직 적응하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 이 도시에 붙어살지 않고 계속 배회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을 뿐이었다. 처음엔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는 도시고, 사람은 사람이고, 나는 나니까.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는 나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불안하지 않으려면 어떤 느낌을 먼저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밀고 들어왔다. 그 어떤 느낌이란, 말하자면, 땅과 자신의 두 발 사이에 수상한 조금의 틈을 조금 남겨놓고는 둥둥 떠있는 느낌 같은, 그런 애매한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야 했다.
지금쯤이면 이미 여기,
이 도시에 두 발을 딛고 서있었어야지.
지금까지 도대체 뭐 한 거야?
미아가 그렇게 겉도는 동안에도 이 도시는 이곳만의 넓고 높으면서 반짝이는 멋을 발했다. 수도권에 비해 그리 바쁘지도 않지만 그리 늘어져있지는 않은, 적당히 크고 적당히 바쁘며 적당히 여유로운 것에서 나오는 멋, 넓고 높지만 평화로운 멋.
미아는 바로 이 멋과 섞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학교를 마치려면 이제 두 학기, 그러니까 일 년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 한 번쯤은 이 도시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고, 두 발로 이 도시의 땅을 조금의 틈도 없이 완전하게 밟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러려면 뭔가가 필요했다.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극적, 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재연을 발견했다. 처음 재연을 본 후로 두 번을 우연히 더 봤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인연으로 부를 만했다. 게다가, 재연은 이 도시 같은 사람이었다.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는 이 도시와 잘 어울렸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미아는 자신이 밖으로 튕겨나가기 직전에 갑자기 끌어당겨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도시로부터, 그 인연이라는 것으로부터.
사람은 다 때가 있다니까.
그는 그렇게 재연과 연인이 되었고, 함께 이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재연과 있을 때면 원래도 잘 오지 않는 전화와 문자, 앱을 클릭해 들어가지 않으면 조용한 SNS,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데도 괜히 스트레스를 받곤 하는 시험 기간, 그리고 자신의 만성적인 불안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이 도시 안에서 재연과 함께하는 시간에만 신경을 썼다.
대학생들의 동네에 사는 재연은 자신의 그 동네와 학교뿐만 아니라, 미아가 사는 또 다른 사람들의 동네와, 그 주변의 장면들, 그 도시의 모든 것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적당히 크고 반짝이는 이 도시와 잘 어울렸다. 어두워지면 켜지는 온갖 조명들로부터 태어난 것 같은 조용한 활기와, 이 도시의 넓고 높은 것들은 물론이고 이 도시에 있는 것들보다 더 크고 넓은 건물에도 전혀 압도되지 않을 것만 같은 이미지, 도로 사이에 버려져있는 담배꽁초에 눈을 찌푸리며 ‘이런 사람들이 문제야’라고 말하는 모습과 모순적이게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걷다 가끔 주위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구석에 침을 뱉는 부도덕함 약간이, 그가 이 도시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 중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우울함과 불안함을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런 것들과는 정반대인 미아를 여기저기 데려갔다. 물론 미아가 자주 가는 곳도 있었고, 아예 처음 가본 곳도 있었다. 주로 저녁 여섯 시부터였다.
그들은 학교를 빠져나왔다.
*
해가 지는 저녁, 작은 패스트푸드점 밖을 지나는 사람들은 안에서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을 보았다. 이 도시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보통의 젊은 연인이군’이라며, 마치 트렌디한 사랑 노래의 뮤직비디오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그들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와 편의점에 들러 재연의 담배를 샀고,
백화점 뒤쪽에 있는 공원을 향해 걸었고,
조금 걷다 다시 큰길로 나와 대형서점에 들어갔고,
몇 분 뒤에 다시 서점을 나와 대형마트로 갔고,
그 안을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빈손으로 나왔고,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진 늦은 저녁, 대학생들로 가득한 프랜차이즈 카페 밖을 지나는 사람들은 마주 보고 앉아 각자의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는 그들을 보았다. 이 도시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보통의 젊고 멋진 연인이군’이라며, 마치 재즈가 흐르는 영화에 흔히 나올 것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그 장면을 지나쳤다.
그 사람들은 그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명을 켜고, 가방을 내려놓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아니면 휴대폰을 켜서 유튜브 영상 하나를 골라 틀어놓고, 아니면 아무것도 틀지 않고 조용한 상태 그대로, 그날의 먼지와 습기가 묻은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할 것이다. 아니면 그대로 부엌으로 향하다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걸 아무래도 무시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귀찮은 걸음을 다시 옮겨 화장실로 향할 것이고, 대충 빨리 손을 씻고 나와 시계를 힐끗 보면 아홉 시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는 익숙하고도 가벼운 한숨이 섞인 한 마디로 이 시퀀스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아, 벌써 아홉 시라네.
그리고 피날레.
그 시간에, 미아와 재연은 밖이었다.
그들은 각자 밖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난 평일인데도 아직 집에 가지 않았다. 계속 카페에 앉아서, 그들과 똑같이 밖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났지만 아직 집에 가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 공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도시 안에 있는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직접 겪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 공간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이 카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담는 프레임 그 안에 있었다. 주도자이든, 조력자이든, 구경꾼이든, 배경이든, 그들은 이 카페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일부였고, 이 카페는 이 도시를 구성하는 일부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있었다. 어디든 그들이 있는 곳이 도시의 중심으로 느껴졌다. 그들 역시, 이 도시를 구성하는 일부였다.
미아는 이제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도시로부터 튕겨나가기 직전이라는 불안함은 지금 생각해 보니 쓸데없는 감정이었다. 아무도, 이 도시 안의 사람들 중 아무도 튕겨나갈 수 없고, 이 쓸데없는 생각들은 다 그저 생각일 뿐, 그런 식으로 어떤 공간으로부터 섞이는 걸 거부당하거나 내쫓기는 사람은 없다고, 그는 비로소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처음으로 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 느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사실 그는, 재연을 만나고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마치 원래 완벽한 이 도시 사람이었던 것처럼 연기하고 있으며, 이런 연기를 꽤 잘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니, 그런 사람인 척하는 게 아니라 이젠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게 단 몇 시간뿐이더라도.
그는 자신답지 않게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원래대로라면 아직도 낯선 이 도시를 낯선 사람과 돌아다닌다는 게 불안해야 마땅했지만, 막상 해보니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이것도 자신답지 않았다. 자신답지 않은 짓을 할 때 불안함이 없다는 건 더 자신답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게, 스스로는 몰랐지만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의 증거일 수도 있었다. 자꾸만 나답지 않은 짓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게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미아는 재연과 함께 더 자주 돌아다녔다. 저녁에, 수업이 끝나고, 수업과 수업 중간에, 밤에. 증거일 수도 있는 그 잠재적 증거들을 빠르게 쌓아 올리고자 했다. 그렇게 이 도시에 중심에 있는 느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미 중심에 있는 재연은 그걸 주도했고, 함께 했다.
어쩌면 다들 이런 식으로 완전한 이 도시 사람이 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다, 그가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에, 특정한 사람과 함께 이 도시를 돌아다닐 때만 이방인 같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이제 이 사람과 영원히 이 도시를 이렇게 함께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의 증거일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이 같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미아는 이런 식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