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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Sep 08. 2024

일곱 개의 장면들 _ 제시부 (1)


그 여름, 그들의 도시는 언제나 그렇듯 외로운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그들의 도시 안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는데, 그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지금 나 괜찮은 건가?
그래서 끊임없이 대답해야 했는데, 그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정말 의미 없는 질문이었어.
반면,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과 대답 같은 것 없이 그 도시에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소수의 사람들만 그럴 수 있었다.

미아와 재연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람들에 속해 있는, 외로운 이들이었다.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지인이 되고 친구가 되는 과정 없이 한순간에 연인이 되었는데, 그래도 그 한순간에는 몇 개의 장면 조각들이 있었다. 빠르게 지나갔을 뿐.



*


 번째 장면.


미아가 학교 정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재연은  옆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5월의 첫째 날이었다. 하늘의 한쪽은 흐리고 한쪽은 맑았다.  사람은 당연히 각자의 방향을 그대로 유지했고, 거의 삼십 센티미터짜리 플라스틱 자의 길이만큼 거리를 남겨놓고 스치듯 서로를 지나쳤다. 낯선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야  만큼 북적이지는 않는 도시였으므로, 그런 것치고는 쓸데없이 너무 가까운 셈이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살짝 피하며 상대방을 힐끗 바라보았다. 별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냥 그들이  순간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뿐이었고, 서로 눈이 잠깐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각자  길을 갔다.


두 번째 장면.


다음 날, 미아는 학교 도서관 1층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그의 테이블에는 뜨거운 커피가 담긴 컵과 손바닥만 한 책 한 권, 그리고 그 책보다 조금 더 큰 노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미아는 방금까지 자신의 얇은 천 가방 안에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 펜을 찾지 못한 채, 조금 쓸데없이 멍한 기분으로 주변만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다. 얇은 천 가방은 펜 하나만 빼고 그의 사물들을 적나라하게 비쳐 보여주었다. 미아는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두었다. 그리고 몇 미터 떨어진 학교 울타리 바로 밖에 위치한 벤치, 그 앞에 서있는 재연을 발견했다.
재연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서서 두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은 채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아는 나중에, 자신이 그를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미아의 자리 딱 그곳까지 닿았기 때문이었다. 여기 좀 봐, 하는 것처럼. 그래서 미아는 거길 보았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컵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커피의 열기가 옮겨져 있었다.

옆모습만 보인 채, 재연은 살짝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걸 왜 가져가? 네가 남기고 간 쓰레기나 가져갈 것이지.
미아는 재연의 목소리에 귀를 최대한 기울였고, 재연이 혼잣말이 아니라 전화를 하고 있던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떤 쓰레기일지 궁금해졌다. 재연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다시 쓸쓸하게 낮아진 목소리였다.
-네가 우릴 망쳤어.
땅을 보며 계속 말했다. 이제는 말소리가 불확실하게 들렸다.
-너는 이제 이 사실도 기억하지 않겠지.
저것 참, 현실에서는 혼잣말로 하기에 어려운 대사라고, 미아는 생각했다.
-네가 우릴 망쳤다는 사실 말이야.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네가 시작했어.
그리고 재연은 고개를 들었고,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미아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재연은 그대로 여전히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네가 모든 걸 망쳤다고.
미아는 이 마지막 대사는 알아듣지 못한 채,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펜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뜬금없는 혼잣말에 놀랐다. 그러다 그는 곧 이 혼잣말이 오로지 진심으로만 이루어진 말이었는지, 이 장면의 연기를 위한 대사였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째 장면.


미아는 카페 ‘녹턴’에 불안하게 앉아 있었다. 재연은 이 카페가 있는 건물의 위층에서 나오는 중이었는데, 미아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아 앞에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책 한 권과 노트 하나, 펜 하나를 꺼내 놓은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쯤이었다. 창밖으로는 작은 중학교 운동장이 보였고, 그 뒤로는 미아의 학교가 보였다.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넓게 퍼져있는 학교 건물들 중에서 한 개의 건물만 보였는데, 미아는 그가 자주 가야 하는 사회과학대학의 건물보다 지금 보이는 이 건물에 더 자주 왔다. 그는 학교 안에서 자꾸만, 이 건물-자연과학대학이었다- 같은, 그와 상관없는 건물들만 찾았다.


벌써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 그리 덥지 않았지만 점점 공기에 열기가 더해지는 게 느껴졌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유난히 흐린 날이었고, 그래서 동네의 가게들은 벌써 하나둘씩 조명을 켜기 시작했다.
그는 앞의 중학교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운동장 울타리 바깥 구석에 쓰레기봉투들이 모여있었고, 그 옆으로는 빌라들이 모여 대학생들의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작은 식당들이, 아주 작은 공터 하나가, 몇 개의 작은 술집이, 그리고 꽤 많은 작은 카페들이 모여있었다. 학기 중의 점심시간이면 대학생들로 북적거렸고, 카페는 항상 사람으로 조용히 가득했고, 저녁에서 밤이 되면 때에 따라 굉장히 시끄럽거나 의외로 조용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거의 모두가, 어서 종강을 하고 자신들의 집이든, 아예 다른 곳이든 이곳을 잠시 떠나 또 다른 새로운 북적임 또는 잔잔한 조용함을 찾길 간절히 바라며 방학을 기다렸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있는 동안 느낄 수 있을 나른함을 은근히 기대하며 기다렸다. 미아가 앉아있는 이 카페 역시 이 공간에 모여있는 빌라들 중 하나였고, 학교와는 인접해 있었으며 미아가 머물고 있는 곳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미아는 이 작고 열띤 대학생들의 동네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이 도시 안의 또 다른 사람들의 동네에 살았다. 그 동네는 여유로웠고 트여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도시의 공간을 넓게 채웠고, 미아가 살고 있는 빌라는 한 아파트 단지의 정문과 큰 상가 건물들이 늘어선 블록 그 사이에 있었다. 미아가 빌라 밖으로 나오면 바로 대형 서점과 프랜차이즈 카페들, 음식점들이 있는 큰 건물들이 보였는데, 그런 것치고는 그렇게 시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생들의 동네가 더 소음으로, 열기로, 낭비되는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미아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의 동네, 그리고 그 외에 또 다른 동네들은 비교적 점잖았는데, 그래서 아예 단란하거나 너무 날카로워 보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대학생들의 동네에는 자주 가지 않았다. 너무 시끄러웠고, 복잡했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자기 또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낭비할 만한 에너지가 그에게는 없었다. 이 도시에 온 처음부터 그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이 동네의 큰 카페와 서점만 돌아다녔고, 학교는 수업만 들으러 왔다 갔다 했고, 대학생들의 빌라가 모여있는 그 동네는 아주 가끔, 예를 들어 팀 과제를 하러 다른 사람을 따라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때 말고는, 잘 가지 않았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 이상한 날이었다. 그날의 모든 수업이 끝났는데도, 그가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고 혼자서 대학생들의 동네에 있는 한 작은 카페에, 그냥 충동적으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직은 잠잠했다. 아마 몇 분 후 저녁시간이 되면, 북적거림을 피해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미아가 휴대폰을 의미 없이 또 확인하고는 한 번 창밖을 바라봤을 때, 재연이 두 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헝클어져 있던 그는, 건물에서 나와 몇 걸음을 걸어 쓰레기봉투들이 모여있는 그곳에 들고 있던 걸 가볍게 던졌다. 미아의 시야에 재연이 들어오자마자 이유 없이 불안했던 그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났다. 재연은 하얀색 반소매 티셔츠에 편한 회색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고, 회색 운동화 뒤축을 밟아 슬리퍼처럼 신고 있었다. 미아는 재연의 모습을 짧게 쳐다보다가, 이번에도 펼치지 못한 책을 가방에 넣었다. 책에 비해 여러 번 펼쳐졌던 노트 역시 가방에 던져졌다. 같이 던져져야 했던 펜은 이번에도 없었다.
미아는 남아있던 한 모금의 커피를 끝까지 마시고, 일어나 자리를 정리했다. 그동안 재연은 다시 옆 건물로 들어갔다. 미아가 카페에서 나왔을 때 이미 재연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다음 버릴 것들을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리고 미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천천히 대학생들의 동네를 빠져나갔다. 인연이라면 또 한 번 마주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북적거림을 피해 자신의 빌라가 있는 또 다른 동네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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