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연은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신호를 기다리다가 몇 걸음 앞에 서있는 미아를 봤다. 미아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재연은 미아의 얼굴을 쳐다봤고,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고, 그는 그제야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시립미술관 입구에 멈춰 섰다. 평일이면 한적해지는 곳이었다. 빗방울이 돌에 툭툭 떨어지며 스며드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술관 간판이 세워진 입구부터 그 주변은 돌에서 스며 나오는 서늘한 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얼굴에 웃음기를 살짝 띤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눈을 뜨고 바로 앞의 깔끔하게 서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아주 옅은 회색을 띤 흰색이었다. 그리고 그 미색 배경에, 초록으로 바뀌어 있는 나뭇잎들이 생생하게, 하지만 화려하지는 않게 적당히 자리했다. 이 동네에서 가장 멋진 건물이었다. 그는 이곳에 올 때마다 이 멋진 건물 앞에서 공기를 마시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저절로 그려졌다.
미아는 같은 건물 안에서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실내는 너무 조용해서, 한 번 움직이는 발소리가 꽤 크게 울리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소리 아래에 제목을 알 수 없는 피아노 소곡이 계속 조용히 울려 퍼졌다. 부드럽고 여유로운 연주자의 손가락이 미아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는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에서의 장면을 떠올렸다. 지금 들리는 연주는 그 장면 속에서 들리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더 자란, 나이가 든 연주였다. 당연하지. 그가 생각했다.
미아는 앞으로 쭉 걸려있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며 천천히 두 발을 움직였다. 사진을 보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이 건물 안에 자신과 직원들 몇 명밖에 없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모든 사진을 다 볼 때까지 관객은 자신 뿐일 것 같았다. 그는 눈썹을 위로 올려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한숨을 작게 내뱉으며 발걸음을 또 한 번 옮겼다. 그는 금세 전시관 안에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에 집중했다.
그는 외로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지금을 설명하는 단어, 초여름과 외로움, 두 단어가 떠올랐다. 두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뭔가가 어색했다. 초여름은 외로움이라는 걸 느낄 새가 없는 계절이었다.
정신없는 격한 계절이 다가오기 직전이잖아.
몽롱함에 대비할 생각만으로도 바빠.
그런데 그 어색한 부조화가 자신과 어울렸다. 갑자기 공간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이렇게 갈라져있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는 듯이 서로를 밀어냈다. 바깥의 쨍한 햇빛과 건물 안의 서늘한 향, 바깥의 가벼운 바람과 이 안의 묵직한 공기가 그랬다. 그리고 두 단어, 초여름과 외로움이 그랬다.
갈라지고 밀어내는 장면들,
이 여름 안, 도시 속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
그게 뭐든, 미아는 그걸 자신이 쓰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미아는 어느 흑백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옛날 배우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보통의 장례식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파티, 에 가까웠다. 장례식인데 사진이 그리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이 배우는 죽었지만, 죽음과 동시에 다시 어딘가에서 생겨나 지금 어디에선가 다시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영혼으로라도. 그러니까,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이라는 유산, 아무나 가지지 못할 그런 것들.
사진 속의 누군가는 한쪽에 놓인 그 배우의 젊었을 적 사진을 구경하는 중이었고, 또 누군가는 라디오 같은 걸 건드리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는 듯 입을 다들 살짝 벌린 채였다. 그리고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옆으로 넓적하게 짧은 잔들은 각각 다른 높이로 까맣거나, 투명했다.
미아는 사진 속 누군가가 보고 있는 이 옛날 배우의 옛날 사진들 중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쪽 손에 작게 카메라가 보였다. 자신과의 접점은 아마도 이것 하나뿐일 것이었다. 손에 든 카메라.
누군가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는 일부러 사진에만 눈을 고정한 채 다음 사진 쪽으로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 사이에 그 사람이 미아 옆에 나란히 섰다. 그렇게 미아와 재연의 몸이 각각 앞의 사진 왼쪽과 오른쪽 변에 놓였다.
재연이 먼저 말했다. 그는 몇 분 전, 실내로 들어선 후 몇 걸음 걷는 동안 줄곧 사진들을 훑으며 자신이 아는 얼굴이나 이름을 찾던 중이었다. 그러다 사진이 아니라 현실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것이었다.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이 저절로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그쪽이랑 말한 적도 없는데 왠지 이미 아는 사이인 것처럼 느껴져요.
-말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본 적은 있죠.
재연은 자신이, 정확히 이 대답이 나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모르는 척 물었다.
-우리가 본 적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봤죠.
미아는 한쪽 손바닥을 편 모양으로 재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재연이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로 물었다. -언제요?
미아는 자신의 입에서 방금의 이 대답들이 술술 나오는 것에 놀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때의 상황을 정확히 말할지, 아니면 본인이 예상한 것을 제외하고 그 상황의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할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쓰레기봉투를 많이 내놓으시더라고요.
재연은 미아의 얼굴을 쳐다본 채 눈동자를 살짝씩 움직이다가 말했다. -쓰레기?
-카페에 있었거든요. 며칠 전에.
그 카페가 어떤 카페였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 쓰레기.
미아는 재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살짝씩, 하지만 빠르게 변하고 또 변하는 과정을 보았다.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극적이라 흥미로웠다.
-대청소를 하시나 보다 했죠.
한편 재연은 이제, 전연인의 물건들이자 쓰레기인 것들을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어 바깥에 내놓던 그때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는 미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뭐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현실에서는 혼잣말하듯 옆에 그림자처럼 서있는 미아의 말을 조금씩 따라 할 뿐이었다.
-아하. 대청소요.
그는 계속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음. 다 내다 버렸죠. 근데 그게 도움이 된 걸까요?
-네?
이제는 미아가 재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재연이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 덕분에 잘생겨 보이는, 그런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얼굴이 특별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쩌면 이 순간의 미아에게만 그렇게 보일 확률이 높은, 평범한 얼굴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가 속으로 말했다.
지금 나한테만 이렇게 보이는 거야.
그래도 어쨌든 이 특별함이 그 순간에 계속 빛나는 건 사실이었다. 자신에게만 이렇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미아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그 특별함을 믿기로 했다. 미아가 자신도 모르게, 하지만 중간중간 분명히 의식한 채로 재연의 얼굴을 관찰하는 동안 재연은 앞의 사진에 시선을 두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애인이 다른 사람이랑 사랑에 빠졌거든요.
재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미아를 바라봤고, 미아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들의 눈이 길게 마주쳤다. 재연이 또 말했다. -그게 이해가 가요?
미아는, 이미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연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미아는 자신의 가방 표면으로도 느껴지는 작은 일회용 필름카메라에 살짝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재연을 바라보았다. 재연은 앞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마치 사진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재연도 사실 미아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강의 물건을 내다 버리던 날, 쓰레기를 버리던 그때, 미아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자신의 모습, 그때 그 시선을 받는 게 좋았던 것도 기억했다. 그는 그때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고,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미아는 재연의 뒤에 섰다. 사진 위에 재연의 뒷모습이 올려졌다. 미아는 그걸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미아는 재연의 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와이퍼의 바쁜 움직임은 비가 쏟아지는 속도를 따라가기엔 조금 힘겨워 보였다. 그는 재연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머릿속에 자꾸 재연이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와, 그가 괴로운 눈을 하고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모든 걸 망쳤어. 그때 재연이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그쪽이랑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미아는, 몇 분 전에 뭔가를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꽤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바라던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깨끗한 칼 표면에 너무 환한 조명이 비췄을 때의 날카로움처럼.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너와 내가 모든 걸 망칠 거야.
그러면서도 재연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감고,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속으로 소리쳤다.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둬 보자.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해본 적 없는 이런 생각을 드디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게 된 것에 대해 희열 비슷한 걸 느꼈다. 순수한 희열이라고 하기엔 불안함 같은 게 섞여있었지만, 비슷하게 느껴졌다. 희열에 뭔가가 섞여있어도, 어쨌든 희열이긴 하니까.
눈을 떠보니 재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아는 자신이,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둬 보자고 다짐하건 말건 상관없이, 상황이 이미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자신의 의지인 걸 알았다. 이미 흘러가고 있는 것도.
그들이 서로를 안고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미아는 벌써부터 상처받은 느낌이었고, 재연은 벌써부터 익숙한 권태가 밀려오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아해도 돼요?
미아가 대답했다. -그럼요.
아니요, 왠지 우린 아닌 것 같아요,라고 했어야 했을지, 미아는 몇 시간 뒤에 혼자 집에서 생각했다. 그쪽이 상처를 줄 것 같아요,라고 해야 했을지, 제가 상처를 줄 것 같아요,라고 해야 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마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말할 거라는 걸 알았다.
좋아해도 돼요.
재연은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걸어갔다. 그리고 가끔씩 혼자 멈춰 서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미아는 재연을 따라 그때마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가 다시 발을 떼면 따라서 발을 뗐다. 재연이 미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 상태로 카페로 걸어갔다.
미아의 긴 하늘색 셔츠 끝이, 재연의 옅은 노란색 셔츠 끝이 따뜻한 바람에 불안정하게 휘날렸다. 바람이 멈추자 똑같이 흔들리던 두 개의 천이 잠잠해졌고, 아직 서로를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오른손과 왼손이 보였다. 그들은 그렇게 불안정한 기류를 타고, 큰 보폭으로 계속 걸었다.
그렇게 여름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