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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Sep 22. 2024

열두 개의 순간들, 넷

균열의 순간

4. 균열의 순간



미아는 이번 달에 여섯 권의 책을 읽었다. 6월이 된 지 열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시험기간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려 애쓰며 책을 읽어 치웠고, 수업 사이사이의 짧은 자투리 시간은 인터넷에서 기사나 짧은 에세이를 읽는 것으로 채웠다. 북마크 표시가 늘어났다. 그러다 이번 학기의 마지막 시험 기간이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코앞에 다가왔을 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공책을 펼쳐 어떻게든 공부에 집중했고, 걸어 다니면서 팟캐스트를 들었고, 밥을 먹으며 짧은 글들을 읽었다. 산책길을 걸었고, 카페에서 틈틈이 과제를 했다. 집에서는 수도 없이 봤던 좋아하는 영화들 몇 개를 번갈아가면서 계속 봤고, 그냥 틀어도 놨다. 절대 질리지 않았다. 대사가 자연스럽게 통째로 외워졌다. 배우들의 표정이 미아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학교가 끝나면 재연을 만났다. 그와 카페에 가서 뭔가를 먹으며 각자의 공부를 했고, 과제를 했고, 휴대폰을 봤다. 재연은 중간에 나가서 담배를 피웠고, 휴대폰을 봤고, 주위의 건물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왔다. 그들은 같이 각자의 공부와 과제와 휴대폰 보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열 시쯤 되면 카페에서 나와 둘 중 한쪽의 집으로 같이 가거나 그냥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날은 잠깐 서점에 가거나 마트에 가거나 패스트푸드점에서 뭔가를 먹거나 편의점에 들렀다. 어떤 날은 학교에서 나와 둘 중 한쪽의 집으로 같이 가거나 그냥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날은 아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떤 날은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점점 만나는 날이 줄었다.

미아는 피곤했고, 재연은 바빴다. 서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계속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었고, 그들도 그걸 알았다. 도시는 그런 그들을 그저 관망했다.


그들이 서로를 보는 날이 줄어들던 때의 어느 날 밤이었다. 재연은 침대에 눕듯이 앉아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재연과 미아가 자주 보는 영화였다.

그들의 취향은 겹치는 데가 꽤 많았다. 그 취향이란 영화와 책과 음악에 국한된 것이긴 했는데, 그게 가끔씩 그들의 대화를 활기찬 형태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순식간에 그들의 목소리 크기와 말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틈만 나면 함께 보는 영화들 몇 개가 암묵적으로 정해졌고, 재연은 노트북으로 그 영화들을 수시로 재생했고, 미아는 그 옆에서 함께 봤다. 처음부터, 아니면 중간에, 아니면 어떤 장면들만, 아니면 끝 부분만 봤다. 오늘은 그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보던 영화였고, 자신이 아는 그 익숙한 장면이 영화 속에서, 그리고 이 현실에서 펼쳐질 거라고, 재연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영화를 재생한 후 처음부터도, 중간부터도, 중간중간에도, 그러다 결국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미아는 재연의 옆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화면 속에서 남자가 테이블에 빈 컵을 내려놓고 여자가 떠난 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 여자처럼 방을 나가 버렸다.


방을 나가면 부엌과 거실이 연결된 공간 아니면 화장실이었다. 아니면 아예  바깥이었다. 재연은 스페이스바를 눌러 영화를 멈췄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바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재연은 잠깐 멍하니 멈춰있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화면 속에서 남자는 계속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결심한 ,  현관문을 열고 본인 역시 밖으로 나갔다. 카메라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여름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약간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그는 카페를 지나, 빵집을 지나, 휴대폰 가게를 지나, 신호등을 건너,  아파트 단지를 따라 길고 넓게 나있는 차도 바로 옆의 길을  달렸다. 계속 남자의 옆모습만 보였다.

그러다 그의 시야에 조금 멀리 버스 정류장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이제 속도를 낮추고,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툭툭 걷기 시작했다.  미터 앞에서 아까  여자가, 그를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재연은 이 시점에서 영화를 아예 껐다. 그리고 노트북을 덮었다. 어차피 남은 건 엔딩 크레딧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침대에서 나왔다. 바로 옆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양말을 다시 주워 신고, 휴대폰을 오른손에 쥐고, 방을 나와 현관문 앞에 섰다. 그도 현관문을 바라봤다. 밖으로 나가야 할지,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우두커니, 몇 분을 자신의 현관문 앞에서 서있었다. 멍청해진 기분이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도 될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 놓인  처음이었다. 그전에, 그러니까 미아를 만나기 전에, 이런 상황이 생겼다면 아마 그는, 그냥 침대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는  계속했을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이런 혼자만의 고민을  상황이 생기기 전에, 벌써 아까 전에 따라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조금의 의문이 생기기 전에 당연하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그는, 자신이 너무나 당연하게 휴대폰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휴대폰을 사용할  있는 사람이라는  잊었다는 듯이, 그저 현관문 앞에 계속 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휴대폰을 사용한 연락 없이 만날 때가 훨씬 많았다.


다행히 몇 분 후, 이 상황이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미아가 태연하게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고,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바로 앞에 서있는 재연에게 말했다.

-잠깐 편의점에 다녀왔는데, 못 들었나 보네.

재연은 휴대폰이 자신의 손에 줄곧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처럼, 아니면 문자나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던 걸 몰랐다는 듯이, 휴대폰 화면을 켜고 액정 위에서 이리저리 엄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집에 간 줄 알았어.

그러자 미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재연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그로부터 여섯 시간 뒤, 사강의 멈춰있는 차 안에서 재연이 말했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거센 빗소리처럼 들렸다.

-모든 건 항상 네가 먼저 시작했고, 나는 거기에 반응했을 뿐이야. 지금도 내가 너 때문에 뭘 하고 있는지 보라고.

그러자 사강이 물었다. -뭘 하고 있는데?

재연은 자신이  간단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할  있다고 생각했다.

-너랑 있잖아.

그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쳐다봤다.  시간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던 미아의 얼굴이 아까부터 자꾸만 생각났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미아가  망가진 관계를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없지만 왠지  확신하게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냐면, 관계를 망가뜨리고 있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근데 정확히 어느 쪽이 더 망가졌지?

그는 아주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괜히 정리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정리된 적은 별로 없었다.

사강은 재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제는   눈을 바라보는  지겹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 있니?

그러자 재연은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아직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인정할게.

이렇게 말하며 그는 익숙한 주인공의 느낌을 느꼈고, 사강은  말을 들으면서 익숙한 지겨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정말, 재연과 관련한 모든 것에 애정이 사라져있음을 느꼈다. 그가 짧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재연이 사강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강이 계속 말했다.

-어쩌면 예전에도 그랬을지도.


재연은 사강이 몇 번이나 이렇게 묻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지?

그가 생각했다. 그 질문들은 뭐였는데? 예전에도 그랬을지도 모른다니?

재연은 자신이 지금, 생각보다 더 상처받았음을 느꼈다. 사강의 말에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부분이 끼어들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강과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그런 것. 어쩌면 사강이 더 ‘주인공스러운’, 그런 캐릭터였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것. 그 의외성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상처받았지만, 동시에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빠르게 생각했다. 자신을 다시 중심으로 끌어와야 했다. 그는 사강 옆에는 이제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고, 사강은-그가 정말 진실을 말했다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은 지금 미아에게 거짓말을 한 채 사강의 집과 차 안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는, 이런 사실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사강을 생각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때 사강이 말했다.

-지금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는 마지막이 될 거야.

재연은 계속 이 멜로드라마 연극 또는 영화 또는 소설 속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끄집어내 봐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들에 뭔가 금이 가고 있었다. 사강은 재연과의 이야기를 이제 와서 부정하고 있고, 그런 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의미 없는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는 재연이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강 자신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 재연의 이야기, 그리고, 여기에 주목하세요! 모두가 몰랐을, 사강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한 탓이었다.

생각이 갑자기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거 사랑에 관한 이야기 아니었어?

청춘들의 전형적인 로맨스 같은 것 아니었냐고.


재연은 어떠한 의문들 없이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어야 했다. 그게 자신에게 익숙하고, 자신이 만들던 멜로드라마였다. 그런  아닌가? 감정이 계속 끊임없이 소모되는데도 눈을   없는 이야기 속에, 계속 상처받으면서도 멋진 분위기를 유지하는 주인공을 보는 . 그를 나와 동일시하는 재미. 물론 재연은 동일시를 넘어,  이야기에서는 이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이미  생각들을 하게  이상,  이야기의 멜로드라마적 분위기는 서서히 희미해지고, 그저 주인공이라는  덕분에 받을  있는 부러움이나 동정심이나 위험한 동경심 같은 것들도, 그리고 자신도, 점점 빛이 바래게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멋이 없을 텐데.

아무도 보거나 읽거나 듣지 않을 거라고, 나조차도.


미아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사강이 말했다. -내 말 들었어?

중심은 사랑이 되어야 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그가 생각했다.

결국 내가 다 망칠 거야. 중얼거렸다.

아, 이럴 바엔 내가 모든 걸 망치도록 해야 할까.

근데 나 왜 이러고 있지?

왜 진짜 이야기를 만들고 있지? 계속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거지?

그는 방금 뭔가에 떠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짜릿한 것 같기도,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내 차에서 내려.

떠밀리자마자, 사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아무 말 없이 조수석 문을 열고 나가, 차 문을 확 닫았다. 그리고는 정면만 바라보며 걸었다. 바람이 휭휭 불어댔다. 사강이 차를 출발시키는 소리가 났다가 곧 빠르게 멀어졌다. 퀴퀴한 공기가 느껴졌다. 재연은 계속 정면을 보며 걸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잡혀야 할 담뱃갑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바뀐 흐름과 처음 느껴보는 혼란스러움에 당황했을 뿐이었다. 갑자기 믿었던 친구로부터 사직 통보를 받은 것 같은, 그런데 왜 해고된 건지 너무 잘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아, 저 해고된 건가요? 어색한 존댓말로, 부자연스러운 척 웃으며, 하지만 진짜 웃는 건 아닌, 그런 대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그는 실제로 이 대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 저 해고된 건가요?

지나가던 남자가 무심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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