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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Aug 31. 2022

자장가의 대물림

"You look happy to meet me."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천천히, 최대한 고요하게 부르는 것이 중요하다.

 곡은  "반짝반짝 작은  아름답게 비치네" 시작한다. 선율이 아름다운 노래다. 박자에 맞춰 토닥이기도 좋다.

두 번 연속 부르고 나면 마치 한 곡인 것처럼 바로 이어서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로 넘어간다. 밝고 빠른 템포의 곡이기 때문에 혹시나 잠에서 깨지 않을까 살짝 마음 졸일 때가 있다. 그래도 최대한 천천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불러본다. 마음을 졸일 거면 굳이 왜 그 노래를 부르냐고 할 수 있지만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다. 내 입에선 어김없이 <작은 별> 다음엔 <나비야 나비야>가 흘러나온다.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귀여운 장면이 연상되는 가사로 끝맺으면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 시작된다. 이 노래는 몰랐던 곡인데 친정 엄마가 아기를 재울 때 부르는 걸 듣고 참 좋은 곡이라고 느꼈다. 가사가 특히 와닿는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자연이 선사하는 역경과 선물,

생존을 위한 인간의 애씀과 성실성,

그리고 긍정성이 느껴졌달까.

거창하지만 동요 가사가 함의하고 있는 상징성은 의외로 광범위하고 깊이가 깊다!

아무튼 여름 생 지민이의 영혼에도 나의 감상이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불러준다.


다음 곡은 우리나라 동요 자장가의 클래식이 아닐까 생각하는 <섬집 아기>. 구슬프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가슴을 저민다.

방에 홀로 남겨진 아기가 바다의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신의 가녀린 팔을 베고 잠든다는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품에 안은 아기를 좀 더 지그시 꼬옥 안는다.


서글퍼진 감정을 그대로 이어가 <클레멘타인>을 부른다. <섬집 아기>의 배경이 바다 마을이듯, <클레멘타인>의 배경도 바다다. 드넓게 펼쳐진 쓸쓸한 모래사장 위에 낡디 낡은 오막살이 집 한 채만 위태롭게 서있다.  

아! 그 자체로 슬프다.

섬집 아기에겐 엄마가 있는데 클레멘타인에겐 늙은 아버지만 있다. 아버지는 ‘넓고 넓은 바닷가’에서 울부짖는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그 울부짖음 마저도 ‘넓고 넓은 바닷가’의 파도소리가 집어삼켜 들리지 않는 듯하다. 섬집 엄마보다 클레멘타인의 늙은 아비가 몇 배는 더 가여워 견디기 힘들다. 재빨리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아빠와 크레파스>. 아빠가 크레파스를 사 오셨는데 대체 왜 그다지도 서늘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선율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최소한 비극적 결말 같은 것은 없어서 안심이 된다.


밤새 꿈나라에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 음, 음.



드라마틱하게 변주되는 멜로디와 가사로 인해 어쩌면 동화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은 <과수원길>. <아빠와 크레파스>를 부르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그 기억의 파편들을 더듬어 보면 거기엔 과수원이 있고, 아카시아 나무도 있다.


국민학교 뒷문 앞 과수원 입구엔 ‘개조심’이라는 푯말이 화가 난 것처럼 적혀 있었지만 나는 종종 언니 오빠들과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 안에 들어가 보곤 했다. 입구를 지키는 개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맹렬하게 짖다가, 우리를 보면 ‘아, 또 쟤네야.’하는 표정으로 다시 권태롭게 엎드려 눈알만 굴렸다.

배나무가 가득한 과수원이었다. 거기서 배를 서리해서 똥꼬에 불이 나게 도망을 쳤냐 하면 그건 아니고, 그저 다 같이 그 안을 천천히 거닐다 돌아왔다. 같은 듯 다르게 생긴 배나무들이 넓은 땅에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는 모습은, 황홀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없이 나무들 사이사이를 걸으며 끝이 없을 것 같은 배나무 숲 속을 어슬렁 거리다가 다시 ‘개조심’ 푯말이 붙은 입구로 돌아왔다.

우리는 거기서 무얼 느끼고 싶었던 걸까?

부드럽게 압도되는 생명력?

포근하게 밟히는 과수원길의 감촉과 소리?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그때의 정서만이 안개처럼 남아있다.


과수원에서 나와 40분가량 걸으면 도착하는 동네 입구엔 아주 아주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고, 바람이 불면 솨-솨- 소리를 내며 눈송이가 흩날리듯 꽃 잎이 마을 안으로 흩어졌다. 그때의 그 향기, 감질나던 꿀맛.

반나절 이상 그 곁에서 개미를 구경하다가, 처음 만난 친구와 소꿉놀이를 했다. 함께 꿀을 빨아먹고, 킁킁대며 향기에 감탄하다가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내일 또 만나자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 나무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랐을까?


놀랍게도 이 모든 기억은 <아빠와 크레파스>가 끝날 무렵, 다음엔 무슨 노래를 부를까 고민하려는 찰나에, 마치 영화 예고편이 상영돼 듯 내 안에서 한꺼번에 펼쳐진다. 그리고 곧장 “동구 밖 과수원 길-” 하고 이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먼 옛날의 과수원 길”에서는 내 유년시절의 추억이 실제로 ‘먼- 옛날’ 같이 느껴지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카시아꽃 다음엔 에델바이스꽃이다. 친정 아빠는 오빠와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서 언제든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중 <사운드 오브 뮤직>은 성인이 된 지금 봐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 인생 첫 이상형은 폰 트랩 대령이다. 사실 엄마의 이상형이었던 것 같다. 그가 처음 기타를 연주하며 -무려 제복 차림으로- 에델바이스를 부를 때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손을 모은 채 감상하다가 노래가 끝나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난 그런 엄마를 보는 게 좋았다. 그래서 나도 폰 트랩 대령을 좋아했고, 그가 부른 <에델바이스>도 좋아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부터 뱃속의 아기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다. 가삿말이 아름다운, 잔잔하고 평화로운 노래를 고민하다가 <에델바이스>가 생각났다. 그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러줬다. 


Small and white
(작고 하얀)
Clean and bright
(깨끗하고 밝은)
You look happy to meet me.
(당신은 나를 만나 행복해 보여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른 덕분일까?

태어난 아기는 정말 하얗고, 깨끗하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잘 먹고 잘 자서 뽀얗게 살이 오른 동그란 볼의 솜털은 에델바이스 꽃잎 같이 사랑스러웠다.

출산 후 한 달간 아기와 떨어졌다가 다시 만난 날, 아기가 나를 낯설어할까 봐 걱정했었다. 그날 밤 아기에게 이 노래를 자장가로 불러줬을 때, 일순간 활짝 피어나던 아기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대미를 장식하는 곡은 <Fly me to the moon>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우주, 혹은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과 행성 사이를 유영하는 장면이 떠오르는 이 곡은 밤 사이 멋진 꿈을 꾸길 바라는 마음으로 불러줬다.

마지막 가사 "In other words, I love you."를 최대한 멋들어지게 부르고 나서 조심스럽게 아기를 살핀다.


확률은 반반이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눈이 감겨 있다면 그땐 천천히 내려놓아도 된다. 그러나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섬뜩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엔 한 번의 깊은 호흡 후 다시, "반짝반짝 작은 별"부터 시작한다. 반복이 지루할 땐 <애국가>를 부르기도 하고, <고향의 봄>이나 <꽃밭에서>를 중간에 끼워 부르기도 한다.


*


퇴원 후 친정에 있을 때 늘어지는 낮 시간,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아기를 안고 한참 동안 거실을 빙빙 걸어 다니며 자장가 메들리를 부르고 있었다.

밤새 함께 갓난아기를 돌보고 초췌해진 친정 엄마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얼마나 불렀는지 모른다.


순간, 시간을 거슬러, 앳된 얼굴의 엄마 품에 안긴 내가 잠투정에 칭얼거리고, 밤잠이 부족해 핏기 가신 얼굴로 -지금의 나처럼- 거실을 빙빙 돌며 노래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낯선 세상을 흠뻑 살아낸 아기에게, 

휴식을 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 들려오는 자장가는

돌보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과,

포근한 둥지 속 평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것은 수 천년 동안 위에서부터 아래로 대물림됐을 것이다. 마치 물이 흘러내리며 산을 촉촉이 적시듯 말이다. 온 세상 각 가정에서 이제 막 생을 시작한 어린 존재를 보살피며 품는 마음이 아름다운 선율과 가사에 담겨있다.

더 이상 자장가가 필요 없어질 때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가 날개를 펼친다. 자장가 같은 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그들의 새로운 세대가 탄생하면, 땅 속에 스며들었던 물기가 샘물처럼 솟아오르듯, 자연스럽게 자장가를 부른다.

그렇게 또 한 생명을 돌본다.


내가 자장가를 멈추는 날은 언제일까?

그때는 섭섭한 마음일까?

홀가분할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놓아져서 더 이상 자장가를 부르고 있지 않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될까?


아직 미숙한 어미인 딸이 재우지 못하는 아기를 건네받은 할미가 다시 노랫말을 이어간다.

아기는 할머니 품에서 더 빨리, 곤히 잠든다.  


1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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