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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May 09. 2024

그렇게까지 하고 싶었던 일이라면

무던히도 서성이던 시간들


굿당에 다녀온 후 며칠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굿당엔 왜 갔는가_‘신령님 고마워요 1편’


아이를 등원시킨 후 집안일을 하고, 책을 조금 읽다가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면 끼니를 해결하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아이를 데려와 쭉 육아를 하는 생활.


그러는 동안 내 몸을 면밀히 감각했다. 내 몸 구석구석에서 7년 간 동거했던 통증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틈틈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뭐 해?”

“청소기 돌리고 있었어. “

“몸은 어때?”

“날아갈 것 같아.”

“어머…….”


남편도 자꾸 전화를 걸었다.


“바빠?”

“아니.”

“몸은 좀 어때? “

“말짱해. 회춘한 느낌이랄까?”

“대박.”


그렇다. 대박이었다.

장장 7년 간 쑤시고 깨질 듯 아팠던 몸이, 온갖 병원 진료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민간요법에도 멈추지 않던 통증이 단 7시간 만에 사라진 것이다. 금은보화도, 부귀영화도, 뭣도 다 필요 없으니 이렇게 아프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의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무당이 했던 말이 자꾸 귓전에 맴돌았다.


승미 씨, 이제 훨훨 자유롭게 살아야 해요.
연극해요.
그래야 남편도, 아이도 잘 풀려요.
집에 있으면 또 아플 거예요.



‘집에 있으면 또 아플 거예요.’



또 아플 거라는 말은 그 어떤 저주보다도 무서운 말이었다. 하지만 자그마치 8년 간(아팠던 건 7년, 연극을 그만둔 지는 8년) 업계 사람들과 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시작한담? (연극계에 몸 담았던 기간에 대해 축약적으로 알고 싶다면)

연기를 해야 할 운명이라는 말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고 반가운 말이었지만 막상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한창 연극을 하고 있을 땐 패기 넘치는 20대였고, 나 하나만 챙기면 되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40대 초입의 문짝을 들이미는 중이며, 무엇보다 내가 돌봐야 할 어린 존재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만한 강력한 동기를 찾아야 했다. 두려웠다. 집 안에서만 맴맴 돌며 수년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무대 위라니.


‘8년이나 쉬었어. 지금 당장 공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해도 바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럼 10년에 가까운 공백이 생기는 거지. 다시 한다는 건 무리야.‘


‘아이가 어려. 아이에겐 아직 ’ 집에 있는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까?‘


‘작품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난 거기에 완전히 신경이 쏠리고 예민해질 텐데…… 그러면 살림도 육아도 다 엉망이 될 거야.‘


‘연극을 다시 시작하려면 혜화역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내가 사는 곳은 용인이다)…… 게다가 공연이 임박하면 밤늦게까지 연습할 텐데…… 어휴, 멀다 멀어. 너무 힘들어서 안돼.’


‘무대 위에서 걷는 법, 소리 내는 법도 다 잊어버렸는지 몰라. 작품 분석은 또 어떻게 하더라? 배우로서의 역량은 다 사라졌을 거야.‘


‘에잇, 무당이 뭘 안다고!’


연극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 만 가지 이유가 발바닥에 접착제처럼 붙어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당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연극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통로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모든 두려움과 걱정을 삭여줄 분명한 목적을 찾는 일이었다.


무당이 다시 연기를 하라고 했을 때, 그 순간 느껴졌던 카타르시스가 생각났다. 그것은 ‘기쁨’이나 ‘행복’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내 안의 꽉 막혀있던 에너지가 마치 흔들었던 콜라병의 병뚜껑을 땄을 때처럼 “펑!”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 안의 가장 큰 욕구를 억누르고 외면했기에 아팠던 게 아닐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배우 할 때의 감각과 흔적을 끊임없이 더듬으며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은 지금까지도 육아 업무 중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이다. 각 인물의 캐릭터에 맞게 혼신의 연기를 한다. 아이가 생후 8개월 때 처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되는 무료하고 고단한 하루, 엄마로서 무능한 것 같다는 자괴감에서 허덕일 때 유일하게 자신감을 갖고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책 읽어주기’였다.

“우리 책 볼까?” 하면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팽개치고 빠른 속도로 기어와 내 다리에 궁둥이를 올려놨다. 각 인물에 감정을 싣고 시시각각 톤을 바꾸며 역동적으로 책을 읽는 엄마를 아이는 신기해했다. 남편은 종종 방에서 듣다가 오디오를 틀어놓은 줄 알았다며 재미있다고, 아이가 배우 엄마를 둬서 좋겠다고 했다. 그때마다 뿌듯했다.  


육아를 하며 앓는 와중에도 꾸준히 요가 수련을 하고 짧게나마 강사로 일했다. 그건 그 자체로 이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요가 수련 중 몸과 마음의 변화를 섬세하게 알아차릴 때의 감각이, 연기를 할 때 의식적이고 관조적으로 몸을 사용하며 느껴지는 신체 감각과 내적 고요함을 닮아 친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4년 전 즈음엔 아로마 에센셜 오일을 접하고 완전히 빠져들어 아로마 테라피 국제 자격증을 취득하고 틈틈이 강의를 한 적이 있다.(나는 기본적으로 오타쿠 기질이 있어서 뭔가에 꽂히면 자격증까지 따고 만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안전한 오일 사용법을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유튜브를 떠올렸다. 지금은 ‘온 국민 유튜버 시대’라고도 하지 않는가. 바로 채널을 개설하고, 영상을 올렸다. 에센셜 오일을 더 많이 알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오랜 기간 훈련으로 다져진 나의 정확한 발음과 목소리를 더 넓은 세계에서 사용하고 싶었고, 세상에 나를 좀 더 드러내고 싶었다. 집 밖으로 나가 일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치던 시기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영상 스무 개를 채우기도 전에 몸이 극심하게 아파와 결국 중단하게 됐다.


다시 통증의 감옥에 갇혔다. 한동안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띄엄띄엄하다 끝난 강사 생활과 유튜버로서의 경험은 집 밖으로 나가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보이고 싶다는 욕망만 더 간절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 성우‘라는 직업이 눈에 들어왔다. 성우는 목소리만으로 감정과 정보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므로 또 다른 테크닉과 역량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요즘은 홈레코딩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픈 몸으로도 무리하지 않고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아이를 돌보며 병행할 수 있다는 부분이 가장 끌렸다. 당장 성우 모집 정보를 찾아다녔다. 관련 책도 읽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혼자 장롱 안에 얼굴을 들이밀고 녹음 연습도 해봤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를 비웃듯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통증이 나를 덮쳤고, 장롱이 아닌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명료하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간 ‘배우’라는 직업 언저리에서

무던히도 서성이고 있었다.


배우를 하라는 무당의 말에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시원함이 느껴졌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이 진정 내 ‘운명’인지 ‘팔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수 년동안 그렇게까지 하고 싶었던 일이라면 해야 하지 않겠는가.

‘엄마’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가 너무 미안해서, 또 아파서 계속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내 꿈이 이제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며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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