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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Dec 04. 2020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으니까.

당신을 열렬히 환영해요!


자고로 관계란, 너무 엮이면 피곤하니 서로의 용건에 충실한 관계가 제일 편한 거라 여겼다. 누군가 내가 정한 기준 이상으로 살갑게 다가오면 슬금슬금 피했고, 예상치 못한 친절엔 당황스러워했다. 차갑고, 냉정해 보이며,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나에 대한 주변의 평은 익숙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번, 6학년 때 한 번 이사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가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유년 시절의 꿈과 상상과 환상들로 가득했던 동네와 하루아침에 이별했다.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 이전 학교의 친구들과 동네가 그리워 여러 날을 이불속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렇게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하지만 곧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나는 전교에서 피구를 제일 잘하는 아이로 이름을 날렸다. 전에 다니던 학교와 달리 학구열이 꽤 높았던 환경의 영향을 받아 공부에도 살짝 재미를 붙였고, 운동회 땐 구령대에 올라 전교생 앞에서 부채춤을 추는 시범조로 활약했다.


그리움의 생채기 위로 새로운 날들을 층층이 쌓아갈 무렵, 다시 한번 이사를 했다. 한 번 더 일상이 전복됐고, 새로운 공기 속에서 모든 걸 다시 쌓아나가야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곳에서 새롭게 친해졌다고 생각한 무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나에게 잘못이 있는 것 같았다. 비아냥 섞인 웃음과 눈빛을 받아내면서도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나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순진했던 옛 친구들은 더 이상 곁에 없었고, 이미 단짝을 이룬 무리들 주변을 유령처럼 겉돌았다.


시련 많았던 초등학교 6학년을 지나 중학생이 되며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접어들었다. 마치 매 해 이사를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친구 만들기'란 나에게 몸서리 쳐질 만큼의 공포와 불안과 수치심을 야기하는,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달성 과제 같은 것이었고, 그에 더해 입시, 시험 성적과 관련한 압박도 새롭게 추가됐다. 그것은 나의 소망과 꿈이 철저히 배제된, 명분 없이 나풀거리며 세워져 있는 깃발 같은 것이었다.

감수성이 유독 충만했던 10대의 나는 매일 밤 눈물을 토해내며 일기장을 꽉꽉 채워 나갔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쓸모가 없다.
나 같은 건 없는 게 모두를 위해 더 낫겠다.


나에게는 타인에게 환영받지 못할 만한 이유가 내재돼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다정한 인사를 건네면 냉소와 비웃음만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방글방글 웃으며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으며 학교 성적까지 좋은 아이들은 공주님이고, 나는 하녀 같았다.


턱을 굳게 다물고, 입꼬리는 내려뜨려 웃음기를 제거했다.

내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고, 눈동자에선 그 어떤 것을 향한 호기심도 건조하게 말려버렸다.

누구도 나를 따돌리거나 괴롭히지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해 시종일관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양쪽 어깨를 끌어올리고, 복부 근육을 수축시켜 스스로 강인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무장했다.


결코 만만해 보여선 안된다. 친구가 없을지언정 따돌림을 당하진 말자!


중고등학교 시절 6년 동안 줄곧 가지고 있던 한 가지 신념이었다. 완전 무장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게 다가오는 친구가 있다면, 그건 분명 무슨 꿍꿍이 속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의심했다. 언제 뒤통수를 후려갈길지 모르니 긴장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경계를 넘어왔던 친구들 덕분에 나의 사춘기는 무사(無死)하게 지나갔다.  


긴 시간 억압돼있던 감정들은 대학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연기를 공부하는 가운데 안전한 장치 안에서 자유롭게 해방되어 풀려나갔다. 나의 퉁명스러움을 귀엽게 여겨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급격하게 확장된 인간관계와 배움은 그 자체만으로 생의 기운을 북돋아주었고, 황폐하고 메말라있던 마음 바닥에 희망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20대의 모든 걸음걸음은 자존감을 찾기 위한 거대한 여정이었다. 그 시간 안에 푹 잠겨있을 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그때 내 가슴을 처절하게 관통했던 모든 환희, 절망, 좌절, 기쁨, 고뇌, 희망, 분노의 시간들은 결국 하나의 깨달음으로 귀결됐다.


나도 귀하다.
나도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다.


이것은 특히 대학 졸업 후, 극단 소속의 배우로 생활하는 동안 더 깊은 확신으로 와닿았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하고 친절한 방식이 아닌, 다소 괴팍하고 불친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만 5년 간 한 극단에 소속된 배우로 있었다. 그곳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집단적이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음습한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것을 쉽게 목도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어쩌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충동적 성향을 더 강하게 띈 사람들이 단체로 모여있는 곳이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단원들은 경제적 소득을 위한 취직 목적이 아닌, 그야말로 연극, 연기에 대한 '열정'만으로, 그러나 '열정 페이'도 지급되지 않는 그곳에서(심지어 회비를 내가며)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대표의 모욕적인 욕지기에도 허허거리면서 연습실을 청소했다. 고장 난 곳을 수리하고, 밥을 지어먹고, 밤새워 공연을 연습했다. 나는 그곳에서 (물론 노페이로) 경리 일을 맡아 극단의 수익과 지출 통장을 관리하고, 극단 대표의 온갖 심부름을 했다. 심지어 대표가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대표는 대체로 매우 난폭하고 포악하고 교활했지만, 그 이면엔 지극히 여리고, 우울한 면도 있었다. 그가 연습실에 등장하면 마치 악의 기운이 지배하듯 분위기가 침체되고, 모두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수 있는 성정의 인간이었다. 내가 따돌림당하며 익혔던, 어떤 상황에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줄 아는 능력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매우 쓸모가 있었다.

적응하거나 체념한 단원들은 남아있었고, 나머지는 진저리 치며 나가거나,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적응과 체념 중간, 그 어디쯤에 걸쳐져 있던 것 같다.

그곳은 밖에선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동굴 같은 곳이었다.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시작과 끝, 들고 남,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다툼, 이해와 오해, 체념과 투쟁, 실망과 희망, 고결함과 추잡함 등이 폭죽처럼 터지는 동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이 극단에 5년씩이나 머물렀는가 하면,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극단 대표이자 연출이 올리는 공연이 국내에서 꽤 좋은 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중견급 배우들도 그가 연출한 무대에 서보길 희망했다.

나를 포함한, 오갈 데 없는(찾아보면 있었겠지만) 어린 단원들은 대표의 폭언이나 폭력, 그가 집어던지는 물건에 맞고 나면 서로의 상처 난 마음을 핥아주고, 다독여줬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어둠의 밤'과 같은 날들을 만난다. 나에겐 극단에서의 5년이 그런 날 들이었다.


6년 차에 접어들 무렵 외부 연출로부터 공연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고려했을 땐 수락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물다섯 살에 극단에 들어가 서른 살에 당도한 당시의 나는 인생의 전환점에 당도해 있었다.

어리석음을 갑옷처럼 두르고 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 채,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느꼈어도 못 느낀 척 스스로를 기만하던 삶에서 탈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령 앞으로 다시는 연극계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 소굴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기로 결심했다.

비로소 나를 좀 귀히 여기기로 한 것이다.  


미련 없이 극단을 박차고 나와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읽고 싶었던 책들을 마음껏 읽고, 요가 수련과 명상에 매진했다. 몸과 마음이 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연기를 하기 위해 20대 전체를 갈아 넣었지만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5년 간 '이상한 나라'에서 살다가 비로소 '편안하고 안락한 내 집'으로 돌아온 듯, 지난날은 꿈결 같았고, 보통의 일상이 정답고 순하게 흘러갔다.


알맞은 때에 좋은 사람이 나타났고, 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이듬해 결혼 후 오래지 않아 아기가 찾아왔다. 내 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환희에 젖어 신사동 가로수길을 걷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꼭 붙어 촵촵촵 애정을 나누는 연인들,
시답잖은 농담에 비틀거리며 깔깔대는 소녀들,
과거의 나처럼 굳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남학생,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듯, 밝고 자신감 넘치는 인상을 위해
얼굴 근육을 한껏 위로 끌어올리고 걷는 볼 빨간 셀러리맨,
홀로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듯 느릿느릿 걷고 있는 할머니,
코에는 붕대를, 눈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휴대폰을 보는 여인,
액세서리가 펼쳐진 좌판 앞에서 꽁꽁 언 두 손을 녹이며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 등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비현실적으로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이 사람들도 한 때는 누군가의 뱃속에 잉태됐었겠구나.

지금 내 안에 있는 아기처럼 그렇게 웅크리고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이 사람들은,

우리 모두는 똑같이,

얼마만큼이나 환영받길 원하며

사랑받길 원하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단순한 소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를 따돌렸던 아이들도, 그토록 인간을 가혹하게 밟아대던 극단 대표도, 희곡 안에서 징글징글하게 갈등하고, 대립하고, 고뇌하던 모든 인물들도.

그밖에 수없이 스쳐 지나간, '밉상'이라 규정지었던 사람들까지 나와 하나의 소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환영받길 원하며, 사랑받길 원한다.


뱃속에 잉태됨과 동시에 함께 잉태되는 최초의 소망.

죽음에 스쳤다가 다시 생으로 돌아왔을 때, 내 안에 이 소망이 늘 웅크리고 있었음을 절절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술 후 의식이 돌아온 직후부터 가족과 병원 관계자들은 내가 살아나서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지에 대해 몇 번이고 들려줬다. 병원 관계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처음엔 좀 의아하게 들렸다.


'나처럼 실려오는 환자는 많지 않나요? 나는 그중 한 명일 뿐이지 않나요?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줘요?’


*


아랫도리로 피가 철철철 쏟아지는 느낌이 반복되다가 추워졌다.

구급 요원은 사뭇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추워요? 담요 드릴게요."

라고 말했고, 내 의식은 꺼졌다.

병원 도착 후 흰 거품을 물고 있는 나에게 엄마가

"힘내, 승미야. 힘내."

라고 말했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의식이 꺼졌다.

당시 메르스가 유행했기 때문에 병원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양측 병원 관계자들의 기민한 조치로 무사통과할 수 있었고, 나는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아주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혈압 체크해! 혈압 체크해!"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혈압이 없어!!!!"

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다.

수십 명의 의사, 간호사들이 연이어 전속력으로 달려 수술실로 들어갔고, 이어서 혈액이 담긴 가방을 든 여사님들이 역시 전력을 다해 수술실로 뛰어 들어갔다고 했다.

수술실 안엔 서른 명에 가까운 의료진이 각자의 위치에서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오직 나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후 집중치료실에서 빨대로 물을 빨아먹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됐을 때 수액을 가지고 온 여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애기 엄마, 이제 괜찮아요?
나, 그때 엄청 달렸어요.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어요. 혈액 가방 나른다고.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리고 일주일 후 2차 수술을 위해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을 때 여성 의료진 몇 분이 말을 걸어왔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아기도 건강하고요? 와! 다행이다!
저희 다 그날 수술실에 있었어요. 모르시죠? 그때는 워낙......
나아지셔서 너무 좋네요! 다행이에요. 어휴, 그날은 진짜......


집중치료실에서의 생활을 졸업하고 일반병동으로 옮겨가던 날, 회진을 돌던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정말 고생했어요!
그날 수술하고 다음 날 우리 의사들끼리 아침 인사가 뭐였는지 알아요?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분 아직 살아 계세요?" 였어요. 하하하!


*


일면식 없던 그들은 진정 한마음으로 나의 소생을 바랐다.

그런 전폭적인 지지와 환영은 그 자체만으로 내 남은 생을 소중히 여기고,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갈 이유로 충분했다.

그들이 단지 투철한 직업 정신만으로 나를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위태로운 생명의 불씨로 하얗게 질려 얕은 숨을 할딱이는, 갓 출산한 여자의 모습 안에서 그들 자신,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나를 살리는 일은 곧 그들을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위해,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더 넓게는 그들이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도 간절한 마음으로 처음 만난 한 사람을 살리는 데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으니까.


그 후로 나는 조금 더 따뜻하고 넓어진 느낌이다.

이렇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꽤 마음에 든다.









D-5


중환자실 마지막날


할미 할비 미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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