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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Sep 01. 2020

죽음이 물었다. “너에게 무엇이 소중하지?”

‘삶’이라는 바다에서 ‘죽음’이라는 그물망으로 ‘별’을 건져 올리기

수술이 끝난 직 후 의식이 흐릿할 때, 한 두 사람 씩 짝을 지어 면회하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친정 엄마가 발을 주무르며 “발이 너무 차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남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시부모님의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친정아빠의 따뜻하고 촉촉한 손이 내 손을 잡으며 “아빠 왔어.”라고 했을 때, 찰나의 순간, 마치 생명줄을 부여잡듯 손에 힘을 주었다. 

아빠의 완벽주의가,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이,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말투가 늘 싫었다. 사춘기 어느 시점부터는 일상의 대화조차 어렵게 느껴져 아빠를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죽음의 늪에 잠겨있는 내 손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꽉 부여잡고 굳건한 힘으로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 아빠뿐인 것 같았다. 무엇이든 다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 신뢰감, 철옹성 같은 나의 울타리.


“아빠 갈게.”


아빠가 잡은 손을 놓았을 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무서웠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의식이 명료하지 않았지만 내부 어딘가에서,


“아빠, 가지 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짐작컨대 수술 직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왔던 것 같다.

아빠는 병실을 나가려다 되돌아와 감고 있는 눈꺼풀 아래 고여있는 눈물을 닦아줬다.


“왜 울어.”


아빠의 목소리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다음날 아침, 계속되는 출혈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기 위해 집중치료실을 나섰다. 색전술이 예정 돼있었다. 무서웠다. 그거 하다 죽으면 어떡하지? 젖 물려야하는데.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꼬질꼬질 퀭한 몰골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남편이었다. 떡진 머리와 빨개진 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울먹이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남편에게 손을 뻗었다. 여전히 뜨겁고 두터운 손. 다시 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루 전만 해도 우리는 새 식구를 맞이하기 위해 새벽부터 양손을 굳게 맞잡고 함께 산통을 견뎠다.

아기가 뱃속에 있는 내내,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는 아기와 함께할 미래의 삶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미래를 향한 무지갯빛 고운 계획들이 이미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셋 정도 낳아 북적거리고 웃음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자고 했다. 우리 둘이서 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틀림없이 행복할 운명이었다.


인생의 환희로 가득 차 있던 유리볼은

단 몇 시간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응급 수술 후, 간밤에 저 세상으로 떠날 수도 있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남편은 밤새 병원 지하 소파 위에 거구의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친정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죽으면 어떡하냐며 ‘소’처럼  울부짖었다고 했다.

몹시도 가여웠던 그날의 내 사람.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 남편은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내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이거 안 아픈 거래. 걱정하지 마. 앞에서 기다릴게.”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다시 집중치료실로 옮기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친정엄마가 황망히 달려왔다.


고마워, 승미야.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간호사, 의사 선생님을 보며) 고맙습니다!
(다시 나를 보고) 고마워.

엄마는 꾸벅꾸벅 인형처럼 연신 반복해서 말했다. 얼굴이 파리했다. 지난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


그날 밤, 비교적 정신이 명징한 상태에서 온 식구가 한 두 명씩 면회를 들어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들 하루 동안의 놀라고 맘 졸이던 가슴을 찬찬히 달래며, 이 아이가 정말 살아있는 건지, 살 수 있는 건지 조심스레 살피듯, 두 눈에 나를 담고,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더듬었다.

나도 손을 뻗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 그 떨림, 촉촉하고 건조한 정도, 나를 내려다보던 그 눈빛들, 눈빛들.


처음부터 나를 예뻐해주셨던 시부모님의 손도 잡아봤다. 거의 울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던 어머님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 당시 시부모님과의 인연은 고작 2년 남짓 정도였는데, 어머님은 마치 20년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표정으로 나를 겨우겨우 살피고 계셨다.

살아간다는 건, 서로 사랑을 나눌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간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만남’을 명상했다. 20분 남짓한 면회시간 동안 온전히 ‘만남’의 순간에 머물렀다.

곧 꺼질 수도 있는 생명의 불씨를 실감하며 내 앞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두 눈에 담고, 가슴으로 느끼고, 손 끝으로 체온을 나누었다. 마치 엄마가 갓 태어난 아기를 전신의 감각으로 느끼듯.


가족이라는 존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있음’을 당연시하기가 쉽다. 그 ‘당연함’이라는 권태로움 속에서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지지고 볶으면서 세월을 보낸다. 좋은 추억들이 있고, 사랑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생존을 위해 부정적 요소들을 뇌 속에 더욱 각인시키기에, 각자의 마음 안에는 분노와 원망, 미움, 자책의 씨앗이 뿌려져, 곧 잡초처럼 빠르고 무성하게 자라난다. 덜 자란 잡초는 뽑아낼 만 하지만, 무성하게 자란 잡초는 이미 뿌리가 깊어 완전히 뽑아내기 힘들어진다.

그러면, 이미 속수무책으로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은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 걸까?

제거할 수는 있는 걸까?

내 마음에 잡초를 뿌리내리게 한 상대방이 뽑아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 상대방이 뽑아주지 않는 한, 내 마음 밭은 평생 잡초로 우거진 땅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걸까?


죽음에 살갗이 쓸리고 돌아와 내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 거기엔 ‘온전한 받아들임’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 속에서 내 앞의 귀한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따뜻하게 존재했고, 미움과 상처, 불만, 분노와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것들은 모두 그림자와 같은 것이어서 빛을 비추면 자연스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었다.


집중치료실 유리창 너머에 누워있는 중환자들이 보였다. 병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길지 않은, 지나온 삶의 주요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촤라락 지나갔다.


‘그동안 뭘 위해 그토록 어금니 꽉 깨물고 종종거렸지?

계획한 대로 잘해보겠다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자책하고, 또 타인에게 상처 주고, 험담하고.

삶에서 중요한 건 실로 단순하구나.

함께 많이 웃고,

애정 담긴 터치와,

삶의 사소한 것들을 따뜻하게 나누는 것.

만약 살아서 나가면 매일매일 반복되는 별일 없는 일상에 깊이 감사해야지.'


산소호흡기와 코 줄, 소변줄, 수액과 수혈팩, 침대에 묶여있는 팔다리에 이르기까지 육체는 완전히 속박돼 있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생의 기쁨으로 가득 차 올랐다.


탄생부터 죽음까지가 마치 하룻밤 꿈처럼 느껴졌다. 만남과 경험을 거듭하며 온갖 감정을 느끼고, 목표했던 바를 이루기위해 애쓰다 어느 날 모든 걸 남겨둔 채 훌쩍 떠나는, 하룻밤만에 끝나는 꿈.

때가 되면, 정들거나 증오스러웠던 모든 만남들, 쟁취했거나 못 다 이룬 목표들을 뒤로하고 당장에 가야만 한다.

그날이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십 년, 이십 년 후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는다.


너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하지?

 

죽음이 물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운데에 두고,

다른 모든 것들을 재구성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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