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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Sep 15. 2020

믿기지 않더라도 완벽한 삶

인생은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

2014년 11월 06일 목요일. 오전 5시쯤?

아마도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새 식구가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빨간색 두 줄이 선명하게 나타난 걸 확인하자마자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아기가 찾아왔다는 확증에 몹시 기뻐하던 내 모습, 비몽사몽 얼떨떨해하던 신랑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은 언제든 다시 떠올려도 궁극의 행복과 흥분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인생의 초특급 선물이었다.


마치 환상처럼,

나의 지난 날들이 영화의 예고편처럼 주요 장면 위주로 빠르게 흘러갔다.

기억 저편에 흩어져있던 삶의 조각들이 하나로 모아져 큰 그림을 만들었다.

그건 마치, 날실과 씨실이 만들어낸 거대한 태피스트리 같았다.

날실과 씨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태피스트리를 코 앞에서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은커녕, 그 촘촘한 짜임새에 현기증만 날 뿐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태피스트리 전체를 크게 보면 비로소 아름답게 짜인 무늬가 드러난다.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닥쳐오고,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것은 삶에서 어떤 문양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여정으로 안내한다.

원하는 것과 계획하는 바가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상황 속에서 반응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삶의 변곡점마다 먼저 다가와주는 귀인을 만나기도 하고, ‘어쩌다 저런 인간이 내 인생에 나타난 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도 만난다. 귀인은 인생의 보석이고, 악연이라 여겨졌던 사람들은 나를 강하고 현명하게 성장시켜줬다.

행복이라 여겨졌던 순간들은 여전히 가슴 안에 빛으로 존재하고, 불행이라 여겨졌던 순간들은 그 일을 겪기 전보다 겸손하고, 지혜롭고, 유연하며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인생 여정의 모든 경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내 소중한 삶을 이루고 있었다.


아기가 찾아온 걸 알았던 그날 하루 종일 감사한 마음이 분수처럼 흘러넘쳤다.

밖으로 나가 그날따라 별나게 아름다운 세상을 감상하며 하늘에 감사기도를 올렸다.


태어나서 감사합니다.
숨 쉴 수 있어 감사합니다.
지난 삶에 감사합니다.
아기를 보내주셔서 진짜 진짜 엄청 많이 무한대로 감사합니다.
사랑과 지혜로 돌보는 엄마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일이 대단히 잘 돼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라고 전혀 의심치 않을 때,

그리하여 현재의 완벽한 삶의 패턴을 고착시키고 싶은 욕구가 단단해질 때,

바로 그때, 신은 우리의 삶에 벼락같은 사건을 초대해 환기를 시켜준다.

나에게는 그날이 출산일이었다.

앞으로 모든 일들이 내가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이 자만의 싹으로 자라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아이를 셋 정도 낳을 생각이었다. 분유는 결코 먹이지 않고 WTO가 권장하는 기간인 24개월 동안 모유수유만을 할 계획이었다. 외동인 아이들은 외로울 것이며 사회성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모유를 충분히 먹이지 않으면 면역력이 약한 아이가 될 것이라 단정 지었다. 임신 기간 동안 여러 권의 육아 서적을 탐독했으니  반드시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 확신했고, 완벽한 육아를 위한 로드맵을 탄탄하게 세우고 의기양양해했다.

이 계획들은 홍수같이 쏟아지던 그날의 혈액과 함께 저기 저 먼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콸콸콸.


사소하게 불편한 일이 닥쳤을 땐 오히려 불평만 하기가 쉽다. 하지만 죽음의 언덕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불행’이라고 규정했던 모든 사건들도 다 꽃처럼 보였다.


‘이 강렬한 출산의 경험도 내 삶의 태피스트리 한 부분에 근사한 문양으로 새겨지겠구나.’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감사하라.
끊임없이 사랑하라.

그리고 시련 속에서 배움을 얻어라.
그것이 너를 진정 강하고,
지혜롭게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창조한 물질 세상에서
네가 행해야 할 모든 것이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친정아빠와 아기. 아빠는 아기가 자신을 더 잘 기억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초록체크 남방을 자주 입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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