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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Sep 15. 2020

믿기지 않더라도 완벽한 삶

인생은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

아마도 어지간히 기다렸나 보다. 2014년 11월 06일 목요일 오전 5시쯤, 새 식구가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빨간색 두 줄이 선명하게 나타난 걸 확인하자마자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아기가 찾아왔다는 확증에 몹시 기뻐하던 내 모습, 비몽사몽 얼떨떨해하던 신랑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은 언제든 다시 떠올려도 궁극의 행복과 흥분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인생의 초특급 선물이었다.


햇살이 화창하고 바람은 선선한 날이었다. 남향집 거실엔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었는데, 태양빛이 창문을 통과해 잘게 부서지며 거실 구석구석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숲 속 공원의 나무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가을색 짙은 환상적인 빛깔을 보석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마치 환상처럼 나의 지난 날들이 영화의 예고편처럼 주요 장면 위주로 빠르게 흘러갔다.




어린 날의 나.

엄마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을 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던 엄마의 손길, 엄마의 냄새.

아빠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보던 나.

오빠와 꺅꺅 거리며 프로레슬링 놀이를 하던 나.

우리가 함께했던 여행들.

망치와 못과 톱을 들고 산속을 헤매며 로빈슨 크루소 놀이를 하던 나.

할머니가 들여준 봉숭아 물이 검붉은 빛깔이 되도록 긴 긴 밤을 인내하던 나.

종종 정전이 돼서 거실이 깜깜해지면

촛불을 들고 오빠와 나를 부르던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때 엄마가 나지막이 들려줬던 노래 '동그라미'.

먹이 나르는 개미들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오후.

꽃과 잎과 조약돌로 요리를 하던 나.

폭우가 쏟아지던 날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우산 없이 자유를 만끽했던 하굣길.

의도치 않게 서로가 주고받았던 마음의 상처들.


*


눈이 항상 슬퍼 보였던 외할머니네 또순이.

전학 갔던 학교에서 나를 따돌리던 아이들의 눈빛, 그 웃음소리.

늘 죽음을 생각했던 사춘기.

언제나 나를 웃게 해 준 친구 주현이.

고입 시험에서 떨어진 나.

상희, 지혜, 선아. 우리들이 좋아했던 세반 상가의 수북한 팥빙수.

공부, 공부, 성적, 성적.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반대했던 엄마.

살아가야 할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던 날들.

총 아홉 개 대학으로부터 받았던 불합격 통지.


*


글 쓰고, 연극하고, 공부하고, 술 마시고, 연애하던 청춘.

뜨겁지만 불안정했던 시절.

어리석고 미숙했던 스무 살.

오아시스 같이 나타난 친구 보미.

서울랜드 케이블카에 나란히 앉아 연극과 저녁 기합 시간을 기다리던 우리.

수동기어 스포티지를 능숙하게 다루는 보미의 모습을 조수석에 앉아 존경스럽게 바라보던 나.


*


어리숙하고 순진했던 나.

속임수와 계략, 기민과 절망, 자기혐오

젊은 날의 연애와 눈물들.

지극히 폭력적이었던 극단 생활.

내가 사랑했던 작품들.

밤새우며 공연 준비를 했던 지하 연습실의 퀴퀴한 담배 냄새.

무대 위 영광의 시간들.

끔찍했지만 사무치게 그리운 그 날들.


*


애틋한 추억, 사랑의 쇠퇴, 관계의 재정립

인간적 성숙, 가치관의 변화.

조금씩 현명하게 만든 시간의 흐름.

요가와 명상. 깨어남과 깨달음. 자아성찰.

성숙한 연애와 결혼.

대인배 남편.

우리의 꿈들. 달콤한 꿈들.

다툼, 화해, 사랑...


 

기억 저편에 흩어져있던 삶의 조각들이 하나로 모아져 큰 그림을 만들었다.

그건 마치, 날실과 씨실이 만들어낸 거대한 태피스트리 같았다.

날실과 씨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태피스트리를 코 앞에서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은커녕, 그 촘촘한 짜임새에 현기증만 날 뿐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태피스트리 전체를 크게 보면 비로소 아름답게 짜인 무늬가 드러난다.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닥쳐오고,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것은 삶에서 어떤 문양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여정으로 안내한다.

원하는 것과 계획하는 바가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상황 속에서 반응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삶의 변곡점마다 먼저 다가와주는 귀인을 만나기도 하고, ‘어쩌다 저런 인간이 내 인생에 나타난 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도 만난다. 귀인은 인생의 보석이고, 악연이라 여겨졌던 사람들은 나를 강하고 현명하게 성장시켜줬다.

행복이라 여겨졌던 순간들은 여전히 가슴 안에 빛으로 존재하고, 불행이라 여겨졌던 순간들은 그 일을 겪기 전보다 겸손하고, 지혜롭고, 유연하며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인생 여정의 모든 경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내 소중한 삶을 이루고 있었다.


아기가 찾아온 걸 알았던 그날 하루 종일 감사한 마음이 분수처럼 흘러넘쳤다.

밖으로 나가 그날따라 별나게 아름다운 세상을 감상하며 하늘에 감사기도를 올렸다.


태어나서 감사합니다.
숨 쉴 수 있어 감사합니다.
지난 삶에 감사합니다.
아기를 보내주셔서 진짜 진짜 엄청 많이 무한대로 감사합니다.
사랑과 지혜로 돌보는 엄마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일이 대단히 잘 돼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라고 전혀 의심치 않을 때,

그리하여 현재의 완벽한 삶의 패턴을 고착시키고 싶은 욕구가 단단해질 때,

바로 그때, 신은 우리의 삶에 벼락같은 사건을 초대해 환기를 시켜준다.

나에게는 그날이 출산일이었다. 

앞으로 모든 일들이 내가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이 자만의 싹으로 자라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아이를 셋 정도 낳을 생각이었다. 분유는 결코 먹이지 않고 WTO가 권장하는 기간인 24개월 동안 모유수유만을 할 계획이었다. 외동인 아이들은 외로울 것이며 사회성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모유를 충분히 먹이지 않으면 면역력이 약한 아이가 될 것이라 단정 지었다. 임신 기간 동안 여러 권의 육아 서적을 읽었으니  반드시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 확신했고, 완벽한 육아를 위한 로드맵을 탄탄하게 세우고 의기양양해했다.

이 계획들은 홍수같이 쏟아지던 그날의 혈액과 함께 저기 저 먼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콸콸콸.


사소하게 불편한 일이 닥쳤을 땐 오히려 불평만 하기가 쉽다. 하지만 죽음의 언덕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불행’이라고 규정했던 모든 사건들도 다 꽃처럼 보였다.


‘이 강렬한 출산의 경험도 내 삶의 태피스트리 한 부분에 근사한 문양으로 새겨지겠구나.’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감사하라.
끊임없이 사랑하라.

그리고 시련 속에서 배움을 얻어라.
그것이 너를 진정 강하고,
지혜롭게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창조한 물질 세상에서
네가 행해야 할 모든 것이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친정아빠와 아기. 아빠는 아기가 자신을 더 잘 기억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초록체크 남방을 자주 입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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