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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Jan 11. 2022

“거, 인생을 흑백논리로 살지 말아요!”

‘좋은 엄마’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완벽하고 싶었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아이의 삶이 때 묻지 않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반드시.


미션 수행 과제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1. 태어나고 일주일 간 매일 아기의 맨 살과 엄마의 가슴이 바로 닿을 수 있도록 품에 안는 ‘캥거루 케어’ 하기.
2. 모유는 태어난 그날부터 24개월 동안 먹이기. (‘분유 따위’는 결코 먹이지 않겠다.)
3. 산후조리원에서도 아기와 최대한 많은 시간 함께하기. 밤에도 곁에 두고 자기.
4. 손탄다 어쩐다 해도 많이 안아주기.
5. 절대로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기. 밝고, 유쾌하며, 긍정적인 엄마가 되기.
6. 안정적 애착을 위해 생후 36개월 전에는 절대 기관에 보내지 않기. 혹은 다섯 살에 유치원부터 보내기.
7. 일곱 살 전까지 절대 사탕이나 초콜릿, 달콤한 음료수 등은 먹이지 않기.
8. 네 살 전까지 절대 배달음식 먹이지 않기.
9. 아이는 세 명에서 네 명 정도 낳기.
10. 향 후 10년 정도는 가정에만 충실할 것.


이 중에서 내가 지킨 건 4번, 단 하나다.


한 달 후 병원생활을 완전히 마치고 집에 돌아와 캥거루 케어를 시도했을 땐 8월 더위의 끈적이는 땀을 질색하는 아기의 오열로 급히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유는 단 한 방울도 먹이지 못했다. 입원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염증반응으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젖이 돌기 전 가슴을 압박해서 모유를 원천 차단시켰다. 아기는 오로지 분유만을 먹고 자랐다.


입원 생활을 마치고 아기가 있는 산후 조리원으로 왔을 때의   상태는 아직 너덜너덜했다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장트러블로 인한 복통으로 마치 내장이 면도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통증이 예고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숨을 죽이고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바르르 떨며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아기와 다시 재회했던 날 밤, 3번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아기를 방으로 데려왔다. 어설프게 품에 안아 분유를 먹이고, 트림까지도 성공했다. 그러다 곧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기저귀를 확인해보니 쉬를 했다고 알려주는 줄이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저귀를 찾아서 아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망할 면도칼이 내 뱃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걷지 못하고 한 손에 기저귀를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아 바르르르르르 떨었다. 속싸개가 풀어헤쳐진 채 내 침대에 누워있던 아기의 칭얼거림은 곧 조리원 복도까지 울리는 우렁찬 울음으로 바뀌었다. 미안해, 아가. 망할 복통. 

파도같이 밀려왔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잔해진 배를 끌어안고 천천히 일어나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고 있는 아기에게 가서 기저귀를 갈아줬다.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줄줄줄줄 흘렀다. 줄줄줄줄 흐르는 것이 눈앞을 가려서 어디가 엉덩이인지, 어디에 찍찍이가 붙어있는지 안 보일 정도였다. 짜고 지저분할 것 같은 그것이 아기의 순결한 얼굴에 떨어져서 속상해 더 울었다.

보송보송 새 기저귀로 갈고 품에 안아줬더니 금세 울음을 그쳤다. 그 후로도 면도칼이 한 번씩 휘저을 때마다 기진맥진해졌다. 아기를 신생아실에 맡기고 방으로 돌아와 끅끅거렸다.


끅끅끅큭. 나는 기저귀 하나 제대로 못 갈아주는 엄마야. 이런 게 무슨 엄마야. 끅끅끅큭.

퇴근한 남편에게 이야기하며 또 끅끅끅큭.


장트러블이 사라진 후부터는 정말 많이 안아줬다. 머리를 제법 가눌  있게 됐을 때부턴 포대기로 어부바를 하고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했다. 상위 3% 우량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기의 체온을 느끼는  좋았고,  가슴에, 혹은 등에 온전히 몸을 기대어 입을 벌리고 잠들어있는 아기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단어로는 형용할  없는 천상의 감동에 휩싸이는 기분이었다.


나머지(5번부터 10번까지)는 너무 허망할 정도로 쉽게 깨져버렸다.

한 참 말 안 듣던 세 살 시절엔 내 안에 이렇게도 ‘화’가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자주 욱하며 눈을 부라렸고, 급기야 자책과 죄책감의 바다에서 익사하기 직전 한 시간 반 거리의 심리상담센터를 드나들었다.

그 후에도 하루하루 파란만장한 육아의 나날을 꾸역꾸역 보내다 아이가 30개월이 됐을 때 마음에 드는 기관을 발견하고 등원시키기 시작했다. 어린것을 너무 일찍 보낸 건 아닌가 때때로 가슴이 아려올 때가 있었지만, 그 아려옴은 가슴의 저어-기 저- 깊은 곳에서부터 비집고 올라오는 자유의 기쁨으로 곧 희석되곤 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주어진  시간 동안 나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독서와 요가를 즐겼다. 고요와 여유는  당시  인생 최대의 낙이었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익숙해질수록 슬금슬금 일이 하고 싶어졌다. 단 몇 푼이라도 내가 일한 대가로 돈을 벌고 싶었다.

아이가 등원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요가 강사 자리를 기웃거렸다. 요가 지도자 자격증을 몇 개 더 취득했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공부들도 했다. 탐욕스럽게 공부하고 게걸스럽게 자격증을 땄다. 나는 일을 하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 됐다.

아이가 만 네 살이 됐을 때였다. 가정에 충실하기로 계획했던 십 년의 반도 다 못 채우고 몸을 들썩거렸다.


이로써 출산 전 세웠던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계획들은, 하나 빼고 전부, 바사삭 허물어졌다.


이렇게 저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런저런 불행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렇게만 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라는 공식이 내 삶 전반에 깔려있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들의 수많은 연구결과들은 그 신념들을 더욱 강화시켰다.


모유 수유가 그랬다.

아기에게 모유가 좋다는  전인류가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유만 먹고 자란 아이들과 분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을 (굳이) 비교하여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모유 수유는 엄마와의 애착을 형성하는데 단연 탁월하며, 분유만 먹인 아이보다 천식, 비만, 자가면역질환 등이  생긴다는 보고가 나와 있었다. 심지어 모유를 먹은 아이들이 인내심과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이는 물론 모유의 가치를 더욱 강조하여 건강한 아이를 양육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정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반강제로 젖을 말릴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똑똑한 과학자들의 이런 연구결과는 너무도 잔인한 것이었다.


아! 가여운 내 아기는 애착에 문제가 생기고 천식과 비만, 자가면역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인가!

그들은 내 아기가 장차 인내심이 부족하고 집중력 없는 어른으로 자랄 거라고 예언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분유 수유도 괜찮다는 ‘연구 결과’를 꼭 찾고 싶었다. 명망 있는 권위자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내 눈앞의 포동포동한 아기가 증명하고 있는데도 자꾸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아기는 참 잘 먹었다. 양이 부족하면 목젖을 달달달 떨며 크게 울어 젖혔다. 응, 그래그래, 얼른 줄게. 잠깐만. 허둥지둥 다음 분유를 타서 먹였다. 그것마저 끝까지 비우고 우렁찬 트림 소리를 내고는 이내 쿨쿨 잠에 빠져들었다. 뽀얗게 살이 오르고, 눈을 맞추면 뻥싯뻥싯 잘도 웃었다. 누가 봐도 건강하고 기분 좋은 아기였다.

그래도, 난 전문가의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갈구했다. 하지만 모유의 놀라운 효능에 관한 정보는 여기저기에 널려있어도, 분유 괜찮다는 글은 분유 광고 속에서 밖엔 찾을 수가 없었다.


수술 후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100일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전까진 아기를 친정에 맡기고 혼자 갔었는데, 그날은 데리고 가서 주치의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 당시 아기는 살이 한창 포동포동하게 찌는 중이라 눈은 살 속에 파묻혀 있었고, 손 목과 허벅지 등, 주름이란 주름은 모두 접혀있었다. 분유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잘 웃는 살찐 아기는 나의 자랑이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기를 힐끗 본 선생님이 물었다.


“가슴은요? 젖이 돌진 않죠?


귀여운 내 새끼에 대한 감상은 말해주지 않고 자기가 말려놓은 젖 질문이라니 괜스레 심통이 났다.


“젖이 도는 게 뭔데요.”

“가슴이 찌르르르하는 느낌 없어요?”

“없어요.”

“네. 가셔도 돼요.”


김 빠져서 슬쩍 맘이 상한 상태로 일어나려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근데요,”

“?”

“정말로 모유를 못 먹은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면역력이 떨어지나요? 감기에 걸릴 확률도 높고요? 인터넷 보면 온통 그런 얘기들 뿐이라서요.”


아기를 보고 있을 때도 마치 목각인형 마냥 내내 무표정이던 의사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곧 나를 향해 일갈을 날렸다.


거, 인생을 흑백논리로 살지 말아요!
아니, 뭐 그럼, 이혼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전부 다 비행 청소년 됩니까?



띵!


전구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었달까.


“엄마는 삐쩍 말랐는데 애기는 튼실하네. 잘 키워요.”


라고 말하곤, 나보다 더 삐쩍 마른 무뚝뚝 주치의는 삐진 듯 옆으로 돌려 앉아 어서 나가라며 휙휙 손을 내저었다.


아기를 안고 집까지 날아서 온 것 같다. 주치의의 한 마디는 비단 모유 에피소드에 한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로부터 쭉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흑백논리’와 ‘각 종 신념’이라는 이름의 그물을 두두둑 잘라내고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또 한 번 배불리 먹고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핑크빛으로 경이롭게 약동하는 생명체.

나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고 죽을 수도 있었지만, 무수히 끼어든 사소한 행운과 숭고한 도움들로 마침내 소생하고야 말았다.


삶과 죽음이라는 대명제 안에서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깨문  ‘이것만이 제일!’ 이라며 주장해야  문제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 당신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구제해주시는군요.


'불행한 결과', '성공'이라는 개념들은 모두 허상이었다. '이 길이 아니면 곧 망하리라.' 융통성이라는 것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흑백논리적 사고방식이다.

뚜렷한 성과를 위한 굳건한 신념과 목표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의외로 아기에겐 별 관심이 없는 산부인과 의사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그 이후 나는 덜 확신하고, 더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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