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巫)로 인해 해방되다.
엄마와 신당으로 갔다. 이모가 소개해준 곳으로, 집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구시가지 속 오래된 상가의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회색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문 옆 파란색 간판에 신당의 이름이 하얀색 고딕체로 적혀있었다. 화려한 문짝 주변에 조화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궁서체 글씨로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원색적인 입구를 상상했는데, 뭔가 김 빠지는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어서 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부는 일반 가정집 같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정환이네 집처럼 나무 벽과 나무 천정으로 된 복고 스타일의 거실이 눈에 띄었다. 현관문 정면의 TV에선 ‘전원일기’가 방영 중이었고, 그 앞엔 사인용 탁자와 방석 네 개가 놓여 있었다.
“거기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소리가 난 곳은 거실 오른쪽에 위치한 주방이었다.
“믹스? 블랙? 아니면 녹차드릴 까요?”
“언니랑 나는 괜찮아. 승미는 마실래?”
이모가 물었다.
“믹스로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몸도 안 좋은데 커피 마시지 말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곧 주방에 있던 여성이 커피와 생수가 들어있는 종이컵 세 잔을 자그마한 쟁반 위에 올려 우리가 있는 쪽으로 가져왔다.
160cm 정도 키의 왜소한 체격이었다. 현대적이고 수수한 디자인의 베이지톤 니트와 검은색 바지를 입었고, 고동색으로 염색한 중단발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외모가 무척 깨끗하고 단아해 보였다. 짙은 눈썹과 짙은 쌍꺼풀 때문에 자칫 강한 인상으로 보일 수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온 얼굴 근육을 끌어올려 환하게 웃는 습관 덕분에 무당을 처음 만난 나로선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열기가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만이 예상했던 무당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모의 안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시답잖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지루해지려는데 무당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승미 씨, 들어와요.”
무당은 거실과 주방 사이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은 로비와 같은 곳이었고, 그 방 안쪽이 점사를 보는 곳인 모양이었다.
엄마가 일어나 함께 들어가려 하자,
“승미 씨만 들어와요.”
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왠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비밀 이야기라도 해주려는 참인가? 탁자 앞에 앉아 맥락 없는 대화가 오가는 도중 뭐라도 들리고 보였던 걸까? 나도 모르게 굽신굽신 하며 무당이 있는 방으로 쫓아 들어갔다.
그곳엔 TV에서만 보아왔던 알록달록 오색 빛깔의 12 신 신상과 제단, 각종 무구가 있었고, 그곳을 다녀간 손님들의 생년월일과 주소, 염원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는 커다란 종이 연등이 천정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무당은 신상과 제단 앞에 매달려 있는 종을 네댓 번 치더니 양손을 싹싹 비비며 신들께 속삭이듯 인사를 드렸다. 나도 똑같이 해야 하나 엉거주춤 서 있을 때, 무당은 한쪽 벽면에 놓인 좌식 나무 책상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나도 얼른 맞은편에 놓인 방석 위에 앉아 그 상황에 적응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무당은 아주 기다란 나무 염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아주 아주 커다란 나무 구슬로 만들어진 염주를 왼손에 쥔 채 우리 세 식구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는 종이에 받아 적었다. 다 적고 난 후, 무당은 손에 쥔 나무 염주를 세차게 돌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표정이 점점 험상궂게 변했다.
“궁합도 안 보고 결혼했어요?”
질문보다 추궁에 가까운 말투에 약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결혼 전에 엄마가 철학관에서 본 적은 있어요.”
“근데? 안 좋다고 안 했어요?”
“뭐, 좋다는 곳도 있었고, 안 좋다는 곳도 있었어요.”
“안 좋다고 하면 하질 말아야지.”
“근데 저희는 사이가 좋아요.”
“그 뜻이 아니야!”
그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무당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고, 나는 ‘묻고 싶지만 (들어도 모를 것 같으므로) 굳이 묻지 않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하아…….”
무당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염주를 아까보다 더 세차게 돌리며 가족의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와 12 신상을 번갈아 보았다. 곧 나에게 시선을 돌려 노려보듯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일 안 해요?”
“한 적은 있죠.”
“무슨 일?”
“아기 낳고 3년 정도는 오로지 육아만 했고, 아이를 기관에 보낼 수 있을 즈음엔 요가 수업을 나가기 시작했어요. 자주는 아니고, 조금씩요. 그리고 다른 일도 하긴 했는데……. 뭐, 지금은 몸이 아파서 이도 저도 다 관뒀어요. 포기 상태예요.”
그러자 무당은 아주 큰 콧방귀를 터뜨렸다.
왠지 굴욕적이었다. 내가 요가 수업을 한 일이 이토록 비웃음을 살 일이란 말인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눌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다시, 무당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결혼 전엔 뭐 했어요?”
아!
결혼 전의 삶은 나에게 이미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야말로 화끈한 20대를 보냈던 것이다.
연극과에서 연기를 전공한 후 줄곧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극단에 소속되어 결혼 전까지 끊이지 않고 연극 무대에서 공연을 올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늘 꿈꾸었던 일들이 실현 됐다고, 정말 행복하다고 느꼈었다.
일 뿐만 아니라, 연애할 때도, 음주가무를 즐길 때도 나는 온몸을 불사지르며 최선을 다해 그 시절을 즐겼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그렇듯 밝은 면만 있었던 건 아니었고, 연극배우로서의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은 지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무당의 질문에 20대의 내 모습이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가자 살짝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짧게 대답했다.
“연극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무당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나무 탁자 위로 패대기쳤다.
그리고 일갈을 날렸다.
옘병!!!!! 그거 해!!!!!!
아마 내 표정은 상당히 멍청해 보였을 것이다. 맹한 눈으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무당이 말했다.
“나 이제 알겠다! 이제 엄마랑 이모 들어오라고 할게요. (밖을 향해) 들어오셔도 돼요오!“
사태 파악을 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엄마와 이모가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무당은 거실에서 처럼 다시 활짝 핀 얼굴로 웃으며 엄마와 이모에게 말했다.
딸, 연극해야 돼요.
무대에 서서, 사람들 앞에서 끼 부리고 살아야 되는 팔자예요.
그 순간,
내 가슴 깊숙한 곳 어딘가 막혔던 곳이 뻥 뚫리듯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당시엔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알지 못했다.
무당은 이어서 말했다.
“결혼도 너무 일찍 했어요. 그것도 사주도 안 맞는 남자랑.”
“근데 얘네 사이는 좋아요.”
엄마가 말했다.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주가 안 맞는 경우엔 보통 자주 싸우지 않나?
무당이 웃으며 말했다.
“사주가 안 맞는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승미 씨도 사주가 센데, 남편 사주가 더 세고, 기운도 안 맞아요. 승미 씨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 자기보다 사주가 더 세고, 기운이 안 맞는 사람이랑 너무 일찍 결혼해서 애기 낳고 집에만 있으니까 당연히 안 좋지.”
내가 반박했다.
“제가 집에만 있고 싶어서 있었던 게 아니고요, 아파서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무당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표창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임신 중에 장례식장 갔었어요?”
잠깐의 정적,
엄마가 대신 대답했다.
“임신 만삭 즈음에 저희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갔었어요.”
“또?”
무당은 이후 한 번 더 다른 장례식장에 갔었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다시 물었다.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아이 돌 즈음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때 애기도 같이 갔었어요.”
“아오! 미치겠다!”
무당이 탄식했다.
엄마가 물었다.
“어머! 그것 때문에 안 좋아요?”
무당이 말했다.
“원래 임산부랑 아기들은 절대 장례식장 근처도 가지 말라고 그래요!”
“어머! 근데 먼 친척도 아니고 할머니, 할아버지니까……”
“안돼요. 큰일 나…. 게다가 승미 씨 같은 사주는 더 안 돼요.”
무당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나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연극하려면 할 수 있어요?”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 어렴풋이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아기의 유년기까지는 육아에 전념하고, 대략 10년 후, 다시 연극 무대에 복귀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지만 몸이 아프면서부턴 완전히 마음을 접었고, 추억의 서랍 한 구석에 고이 담아두었었다.
“글쎄요……. 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면 할 수는 있겠지만…….”
지난 7년의 세월 동안 아이와 함께 아동극을 보러 갔을 때를 제외하곤 공연장 근처에 가본 적도 없었다. 과거에 함께 공연했던 동료 배우가 공연 소식을 전해도 애써 모른 척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하고 싶어질까 봐.
내 안에 미련이 남아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들킬까 봐.
“승미 씨는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있는 무대에 서서 승미 씨 표정으로, 말로, 몸짓으로 끼를 부리며 살아야 하는 팔자예요. 예술로 풀어 먹고살아야 한다고요.
이런 사람은 집에 있으면 반드시 아파요. 내 타고난 사주대로 살질 못하니까. 승미 씬 우리네 같은 사주예요. 무당을 해야 하는 사주는 아니지만, 우리랑 같아요. “
‘몸에 전율이 흐르다.’
이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공연 중 무대 뒤 어두운 구석에 홀로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며 고요히 앉아있을 때,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나는 꼭 무당처럼, 계속 이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네.’
그런 생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적이 없었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고, ‘풉, 뭐래, 그런 게 어딨어.’ 하고 잊어버렸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엄마에게 복수라도 한 듯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 시절, 심사숙고 끝에 엄마에게 예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너, 네가 예쁜 줄 착각하지 마!”
라며 단칼에 꿈을 짓밟음과 동시에 인간적 모멸감까지 안겨준 일이 있었다. 이후로도 엄마는 종종 그 길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나를 단념시키려 했었다.
어린 시절 묵살 당했던 나의 꿈.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 연극과에 합격, 연기를 전공하고, 원하던 무대에서 우상으로 여겼던 배우들과 공연을 올렸을 때의 영광. 연극을 하는 중에도 내 안엔 늘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연극을 하면서 크고 작은 고난이 닥쳐올 때마다,
“어쩌면 엄마 말대로 나는 이 길에 맞지 않는 사람인 걸까?”
라는 생각이 줄곧 따라다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 엄마도 내 공연을 보러 오고, 뿌듯해했음에도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그 의심이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무당의 눈빛이 갑자기 바뀌었다. 내 눈을 보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 있는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술 마셔.”
“네??”
“술 마시라고. 너 옛날에 술 잘 마시고 돌아다녔잖아. 밤새도록 마시면서 잘 돌아다녔잖아!”
천방지축으로 놀아 재끼던 20대 시절의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당황하며 우물쭈물 말했다.
“애기도 있고, 나이도 있는데 어떻게 지금 그러고 다녀요.”
무당은 개의치 않고 또 다른 말을 했다.
“그리고 너, 언제부터 그렇게 살림에 신경 쓰고 조신 떨면서 살았다고 집구석에서 그러고 앉았어!”
“네에??”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새침한 표정으로) 요 돈은 요렇게 모으고, 이 돈은 요렇게 저축하면서 아껴 써야지. “ 하면서 살았냐고!”
“깔깔깔깔!”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평소 가계부를 쓰면서 남편에게 하던 말투 그대로였던 것이다.
엄마가 말했다.
“아니, 주부니까 절약하고 돈을 좀 모아야죠.”
“아니에요, 언니.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아서 돈이 모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승미 씨 같은 사람은 살림 같은 거 관두고 밖에 나가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술 사주고, 밥 사주고, 얘기 들어주면서 한량 같이 살아야 돈이 들어와요.”
크흐! 최고의 팔자 아닌가!
분명 20대 땐 충분히 그러고 살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살라고 멍석을 깔아줘도 겁나서 못하는 판국이다. 그리고 무당은 마치 우리 집에 CCTV라도 달아둔 것처럼 집에서 내가 평소에 자주 하는 행동, 생각을 줄줄줄 읊으며 을러댔다.
“애 유치원 보내놓고 그렇게 이불 속에 들어가 눕지 말고 무조건 나가! 밖으로 나가서 공원을 뛰든지, 카페에 가서 친구라도 만나고 오든지 해! 요가 같은 거 하지 마! 신나는 거 해, 신나는 거. 옷도 좀 예쁜 거 사 입고, 화장도 좀 하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결혼하더니 왜 그러고 살아. 그리고, 네가 밖으로 나가야 남편도, 애기도 좋아. 명심해! “
엄마가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여하튼, 얘 연극하면 안 아파요?”
“살(煞)은 한 번 풀어줘야 해요. 너무 세게 껴있어서. “
엄마가 다시 물었다.
“그거 하면, 안 아파요? 난 그게 제일 중요해요.”
“네. 많이 좋아질 거예요.”
이튿날,
나는 안개 자욱한 어느 외곽 지역의 굿당으로 향했다.
너, 그렇게 아프고 힘들어서 어떻게 살았느냐.
고생했다! 고생했다!
아이 보내 놓고,
식탁에 멍-하니 앉아 창 밖만 보면서 한숨 쉬고,
아이고, 설워라!
‘나 죽으면 저걸 어쩌나, 불쌍해서 어쩌나.’
혼자서 울기도 많이 울었구나.
가엽다! 가엽다! 고생했다, 아가!
그렇게 죽어라, 죽어라 힘들어도
너희 부부
서로 아껴주고 예뻐하고 사랑해 주면서
참 착하게 살았구나!
내가 도와주마!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말아라!
너, 나가라! 사람들 사이로 나가라!
네가 나가야 남편도, 애기도 다 잘 되니
아무 걱정 말고 나가라!
내가 도와주마!
너는 우리 제자와 같은 신(神) 사주라,
춤추고 뛰어라!
춤추고 뛰어라!
춤추고 뛰어라!
천인간 만인간 앞에 드러나는 삶을 살거라!
이쁘게 꾸미고,
천인간 만인간의 꽃이 되거라!
7년 간 숨통을 조여왔던 원인 모를 통증은
7시간의 살풀이로
그날 내가 쏟아낸 눈물과 함께
완전히,
씻겨 내려갔다.
살(煞)이,
풀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