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승미 Apr 25. 2024

신령님 고마워요 (1)

7년의 고난

뜬금없이 신령님이라니 의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급격하게 바뀐 내 삶의 스타트는 신령님이 끊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몹시 신묘했던 그날의 일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겠다.


이 글은 미신을 조장하거나 무속 신앙의 영검함을 강조하기 위함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뜻밖의 제안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내 속은 텅 비어있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죽어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심해 아래로 끝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정수리 쪽에 안개가 낀 듯 정신이 뿌옇게 흐린 느낌이었다.

아직 침구 정리가 되지 않은 침대의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 통증에도 둔감해질 수 있는 걸까?‘


이 정도면 2주 전에 비해 팔팔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빨래를 널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베란다로 나갔다. 햇빛을 오랜만에 쬐는 것 같았다. 가벼운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앞에 15층 아래 전경이 펼쳐졌다. 아찔하게 멀어 보이는 그곳에 사람들과 차들이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만 외딴섬에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천천히 창문 가까이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떨어지면 끝나겠어.

아니, 떨어져야 끝나는 거야. 이 고통이.‘


그때, 친정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좀 어때?”

“그냥 그래. 죽을 것 같이 아팠던 건 지나갔어.”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곧 결심한 듯 말했다.


“엄마가 무당한테 가보려고.”


풉, 웃음이 나왔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지 1년도 채 안된 엄마가 무당 집에 간다니 코미디 같았다. 엄마는 진지했다.


“너 아직 젊은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 병원에 가도 원인이 없다고 하니까 한 번 가보려고. 돈 천만 원 들여서 굿을 해야 안 아프다고 하면 까짓 거 해보지 뭐.”


아! 모정이여!

모정이 주 예수를 이겼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양의학도, 한의학도 모르겠다고 하는데 무당은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그렇게,

나는 무교(巫敎)에 발을 들였다.




7년의 고난


장장 7년의 세월 동안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7년.

출산 직후의 과다출혈로 인한 대량 수혈과 응급 수술, 그리고 산후조리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거라고, 아이가 자라고 내가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많아질수록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점점 괜찮아지기는커녕, 불시에 찾아오는 통증과 무기력증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를 해봐도 결과는 이상 없음.

처음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엔 더 큰 좌절감이 들었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며 의아해하는 의사 앞에서 꾀병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제점을 찾을 수가 없으니, 거기에 맞는 치료법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의원에서도 검사를 하고,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비싼 보약을 수개월 동안 먹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통증의 감옥에 갇혔고,

점점 시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무사통과 라거나, 다시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것은 전신에 통증을 몰고 왔다. 마치 성인 여러 명이 주먹을 쥐고, 내 온몸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편두통으로 시작된 두통은 곧 정수리를 쇠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고통으로 바뀌었고, 어떤 종류의 진통제도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혹독하게 아팠던 건 아니었다.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시절에도 종종 찾아오는 통증에 괴롭긴 했지만 며칠만 버티면 사라지므로 견딜만하다고 느꼈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괴로웠던 건 내 신체의 통증이 아니라, ‘고립된 상태에서의 온종일 나 홀로 육아’였다.)

하지만 출산 후 5년이 지나면서부터 통증의 주기가 점점 잦아지고, 강도도 세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면서 야심 차게 시작했던 일들도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집에서 끙끙거리며 겨우겨우 최소한의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통증이 찾아오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내 한 몸 추스리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은 극기훈련에 가까웠다. 수시로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다그쳤다. 그리고 그로 인한 죄의식은 나에게 더 깊은 생채기를 냈고, 자기혐오에 빠지길 반복했다.


그러기를 7년.

엄마가 무당집에 가자는 전화를 걸었을 즈음 내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2021년 2월이었다.

쇠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끔찍한 두통과 쇠막대기로 마구 찍어대는 듯한 무자비한 전신 통증이 나를 집어삼켰다. 강력한 진통제를 한 번에 네 알씩 털어 넣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소파와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생으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와 턱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의 굉장한 통증이었다.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몸을 일으켜 아이의 끼니를 챙기고 유치원을 보냈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신세가 기 막혀 눈물이 줄줄줄줄 흐르다가도 아이가 하원하면 다시 웃으며 반기고 간식을 준비했다.

이때의 통증들은 일주일을 채우고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출산 후 목숨이 위태로웠던 위기를 겪고, 수술 후 지난한 회복의 시간을 보낼 때에도 언제나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서 내 아기를 품에 안고, 직접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착한 남편과 알콩달콩 살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부모님께 무시무시한 슬픔의 고통을 안겨드리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어서 무조건 다행이라고.



그즈음 나는 이제 그만 죽고 싶었다.



<2부에서>


브런치북 [죽음을 명상하는 엄마 입니다]





이전 01화 아무튼 나는 다시 배우가 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