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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Nov 19. 2024

언제나 모성이 최우선은 아니다.

엄마 노릇

‘결혼한 후에도 일하는 여자는
팔자가 세다.’

‘공무원 남편을 만나
집에서 살림하고, 애를 키우는 것이
여자로서 가장 편안한 삶이다.’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어머니는 희생적이다.’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내가

자라는 동안 심심치 않게 들었던 말들이다.

옳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은연중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생후 3년은 한 인간의 인생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아동 심리 연구 결과가 있으므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니,

3년이 무엇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긋 웃으며 반겨주는 엄마가 필요할 테니

최소 사춘기 전까지는 집에 있는 것이

엄마 된 도리라 하겠다.’


‘진정한 모성’이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 성질의 것이므로

나의 체력,

나의 시간,

나의 정신 에너지는

1차적으로 내 자식을 향해야 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요리를 하고,

집안을 깔끔하게 정돈하며,

밝고 화사하고 따뜻한 표정으로

친절하게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엄마라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다.



‘엄마’라는 역할과 관련해

이렇듯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었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나 애쓰면 애쓸수록

‘모성 신념’은 현실의 나와 분리되어

더 멀어지기만 했다.

잡으려 하면 할수록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제는 안다.

애초부터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


아이의 존재는 경이롭다.

내 뱃속에 존재한다는 걸 알았던 그 순간부터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져들었다.


스스로 나를 뿌리치고

제 발로 걷겠다고 하기 전까지

나는 어디서 무얼 하든

아이를 포대기로 꽁꽁 싸

업고 다녔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오랜동안 한 몸이었다.


내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려와 통증이 느껴진다.

지극히 사랑하면

통증이 느껴진다는 걸

아이를 낳고 알았다.


나는 간절하게 원한다.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 길.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을

촘촘하고 섬세하게

내 안에 다 담을 수 있길.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두려운 일은

내 아이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다.

아이가 다섯 살 때,

아파트 단지 내에서 함께 숨바꼭질을 했다.

내가 술래였을 때

다른 아파트 건물로 들어가 숨은 아이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적이 있다.

나는 그날 이 세상이 끝장나버리는 줄 알았다.


이 모든 것들의 원천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모성애’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모성애’라는 찬란한 이름 뒤에 놓인

그림자의 존재를.


그 그림자 안에는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수준의 분노,

아이를 팽개치고 ‘나’를 내세우고픈 욕망,

시도 때도 없니 넝쿨처럼 휘감아오는 죄의식,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부유하는 방대한 눈물이

일렁이고 있다.


*


아기가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울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 울음소리가 나를

찌르고 때리고 할퀴고 찢었다.

나는 완전히 패배한 것만 같았다.

어두운 밤의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무서운 생각을 했다.


아이가 잠든 방을 조용히 나오면

난장판이 된 거실이 기다렸다.

최대한 천천히, 소리를 내지 않고

장난감을 정리한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다.

존재가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걸 뒤로 하고 도망치고 싶다.


아이에게 온종일 말을 건다.

약간 높은 톤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아이는 아직 탄성에 가까운 소리만 낼뿐이다.

내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다

공허하게 흩어진다.

아기와 단둘이 함께하는 거실에서

갈 곳을 잃은 채 부유한다.

내 언어들은 모래성처럼

쌓아도 쌓아도 무너지기만 한다.


아이의 낮잠 시간에 책을 펼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주길.


어쩐 일인지

아이가 좀처럼 낮잠에 들지 못할 때

소리를 질렀다.

미친 괴물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한바탕 지랄을 떨었다.

정신이 돌아오면

화장실로 들어가 눈물을 쏟아내고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이는 나를 용서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됐다.

내 안의 밑바닥을 보았다.


나는 엄마로서 실격이었다.

해로운 엄마는 아이 곁에 없는 것이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내 존재는 ‘엄마’ 그 자체였는데,

실패한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왕복 네 시간 거리로

심리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때때로 나는 간절히

아이를 떼어놓고 싶었다

아이가 함께 있을 때,

나는 배터리가 된 느낌이다.

보이지 않는 선이 아이에게 이어져

나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흘러간다.

코드를 뽑아버리는 상상을 한다.

나는 충전이 필요하다.

미치도록 책을 읽고 싶다.

서로의 언어를 축조하는

성인 어른과의 대화가 간절하다.


말을 배운 아이는

아침부터 밤까지 종알거렸다.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아이의 목소리는 대체로 사랑스러워서

또다시 가슴에 통증을 일으켰지만,

나에겐 고요한 시간 또한 필요하다.

내가 엄마라는 걸 잠시라도 잊고,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간절히 필요로 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필사를 할 때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며

엄마의 신경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려 시도한다.

내 안의 신성한 경계를 침범당한 느낌이다.

종종 못 들은 척한다.

날파리를 쫓아내듯 경계 밖으로 몰아낸다.

나는 내 안으로,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도망친다.  


이 모든 건

내가 생각했던

엄마 노릇이 아니다.


-


엄마의 자격은 무엇인가.

엄마의 욕구 실현은 어디까지 가능하며,

엄마로서의 책임은 어디까지가 하한선인가.

자연스러운(Natural) 엄마는 어떤 엄마이며,

부자연스러운(Unnatural) 엄마는 어떤 엄마인가.

그것은 누가 정했는가.


지금 이 사회는

‘모성’을 볼모로

엄마들을 집에 잡아두려 하지 않는가.

과연 그런 시대는 종식된 걸까.


***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엄마라는 ‘역할’에

내 존재 전체를 잠식당하지 않을 테다.


나의 일로 돈을 벌고,

더 맹렬하게 글을 쓰며 굳건히 존재하겠다.


그때마다 사회가 부가하는 죄의식 따윈

쓰레기통에 내팽개치고,


내 딸과 함께

주어진 시간을 당당하고, 즐겁게 살아내리라.


앞으로 10년,

그렇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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