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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Nov 26. 2024

자기혐오에서 자기 돌봄으로

상처와 꿈, 무의식

나는 너무 부족했다.

아동 심리와 육아 서적을

종류별로 독파했으나

아기를 돌보는 일은

이론과 같지 않았다.


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렬하게 울었고,

내 몸은 바스러질 듯 아팠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라고

모두가 이야기했다.


시간이 흘렀다.


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떼를 썼고,

내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얘가 나를 힘들게 해!’


두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원망했다.


나는 외롭고, 우울했다.

소진되고, 절망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옛날 엄마들은 더 힘들었어.”

“저 사람은 애가 셋이나 돼.”

“엄마는 원래 그런 거야.”


나는 나를 질책하고, 타박했다.

원망하고, 저주했다.

비난하고, 혐오했다.


거실창으로 햇살이 들어와

아이의 봉긋한 이마를 밝게 비추어주던

어느 평온한 아침.


“나 같은 엄마는 사라져 주는 게

아이에게 더 나을지도 몰라.”


진심이었다.

아직 ‘엄마’라는 존재를 기억할 수 없으니

지금 사라지면 그리움도 없겠지.


그렇게 사흘 정도가 지나면

그 사이 더 뽀얗게 피어오른 아이가

눈이 부셔서

나는 살고 싶어졌다.


심리 상담을 예약했다.

꿈을 꿨다.


범람한 하천의 흙탕물을 건너는 꿈.

그곳에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런 곳에선 더 강해져야 해.


*


상담사와 선택의 동기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다.

내 모든 선택의 동기는

‘엄마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 헤어스타일, 의상, 인간관계, 커리어,

그리고 아기를 충분히 잘 돌보고 있는

능력 있는 엄마인지, 아닌지.

친정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혹은 선택을 대신해 줄 대상을 찾아다녔다.

스스로 선택하기가 두려웠다.

결과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자책하거나 비난했다.

책임을 떠넘겼다.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리고 비난하는 나를 비난했다.


육아 중 몸이 너무 힘들 땐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하다.

육체가 극도로 힘들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는 걸

육아를 하며 깨달았다.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엄마가 성가셔하면 어떡하지?’


엄마가 힘들까 봐가 아닌,

아기와 나를 귀찮아할까 봐

두려웠다.

엄마로서 부족하다고 평가받을까 봐

두려웠다.

이것은 철저히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엄마는 단 한 번도

그런 뉘앙스를 풍긴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 두려워 몸서리쳤다.

*


상담을 시작하고 매일 꿈을 꿨다.


강원도 동해 근처.

배를 타고 노를 젓고,

등산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훈련을 받는 중이다.

장시간 훈련을 받았다.

몸은 고되지만

자연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해서 그런지

마음은 상쾌했다.


/


좀비를 칼로 무찌르는 꿈을 꿨다.

밤새 좀비들과 싸웠다.


/


하얀색 작은 자동차를 갖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아주 깨끗하고 뽀얀 자동차였다.

견고하고 단단하며,

작고 단순한 디자인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


과거에서 과거로

무의식의 무의식으로

고된 여행을 떠나며

내 안의 여러 부분들을 만났다.


겁에 질려 두려워하며 웅크리고 있었던 부분

격분하여 왕왕 소리를 지르던 부분

칭찬과 인정을 갈구하는 부분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부분

무력감에 자포자기하고 있던 부분

스스로를 쓰레기처럼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부분

모든 부분들은 나를 돕기 위해 존재했다.

더 큰 두려움과 아픔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상담사가 말했다.


본인의 아기를 돌보듯 스스로를 돌보세요.


누군가를 전념을 다해 돌본다는 건

그저 지극한 정성과 배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전념을 다해 돌본다는 건

그전까지 내 존재를 지탱해 줄 만큼 소중한 무언가를

팽개쳐두는 일이다.


팽개쳐둘 수밖에 없다.


그가 나를 부르면

그 즉시 달려가야 하므로.


그러다 문득 뒤돌아

나에게 소중했던 그것이

함부로 널브러져 있는 걸 보고

마치 내가 버려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수개월 간의 상담이 끝날 즈음

다시 꿈들이 무의식을 두드렸다.


/


장소는 찜질방.

수백 개의 계단으로

여러 층이 나뉘어 있는 찜질방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그중 예술 대학에 다니던 시절,

특전사 출신 동기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를 불러서 인사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연극을 안 하고

집에서 아기를 본다고 하면

나를 초라한 사람으로 여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기를 돌보는 ‘엄마’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하고 신성한 일인데

스스로를 부끄럽고 초라하게 여기나,

다시 생각했다.


/


잘 모르는 남성과 함께 있다.

그 남성에게 물구나무서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며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

과감하게 두 팔로 물구나무를 선다.

하지만 안정적인 지반이 아니었기에

위태로웠던 나는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깜짝 놀란 남성이 떨어진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발가벗은 채 누워서

깔깔깔 웃으며 실수를 받아들인다.


*


높은 의식 차원과의 교감,

내면에 접촉할 시간,

내 몸을 돌볼 시간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꿈이 메시지를 보냈다.

너 자신도 돌봐야 해. 그럴 때야. 괜찮아.
균형, 맞출 수 있어.


*


나에게 요가는

육체와 마음을 함께 돌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엄마 역할을 하는 동안 뒤로 미뤄두었던

내 몸의 감각,

내 마음의 욕구들을

숨으로 쓰다듬고,

다정하게 바라봐준다.


그렇게 하면,

나와 일상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곳으로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 때야 비로소

삶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다.


삶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다.

누구도 원망 않고,

선택의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괜찮은 엄마가 되기 위해선

먼저 어른으로 성장해야 했다.


그 후에야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이의 꿈틀거리는 눈썹,

또르르 흐르는 눈물,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

동그랗고 발그레한 뺨,

반들거리는 동그란 코,

오물거리는 입술,

바짝 선 볼의 솜털들.

그리고 나의 사랑을 바라는 아이의 마음.


내가 나를 돌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의 마음을 진정으로 보듬어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선뜻 도움을 요청하고,

때때로 아이와 분리되는 것,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엄마라는 증거가 아니라

아이를 더 잘 돌보기 위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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