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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Dec 10. 2024

모녀서사 2_내가 원했던 것이 엄마에게 없었다.

<당신 엄마 맞아? Are you my mother?> 엘리슨 벡델


어두운 밤


엄마는 2남 3녀 중 첫 아이였다. 할아버지는 박봉의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었고, 할머니는 야무지고 생활력 강한 주부였다. 엄마는 태생이 얌전하고 차분한 아이였다. 밖에 나가 뛰어놀기보다는 집 안에 돌아다니는 자투리 천과 솜을 모아 홀로 인형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 입이 짧고, 비위가 약하고, 꼼꼼하지만 느린 편이었다. 이 점은 할머니의 심기를 건드렸다. 복스럽게 잘 먹는 아이였던 이모와 달리, 엄마는 가리는 음식이 많아 식사 중 헛구역질을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엄마의 어깨를 탁! 치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얘는 왜 이렇게 주는 거 없이 미운가 몰라!”


부엌일을 돕는 엄마의 속도가 성에 안 차면 역시 탁!


“저리 가! 느려터져 가지고!”


엄마는 할머니의 부드러운 눈빛과 다정한 손길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약주를 즐기셔서 종종 거나하게 취하시곤 했는데, 그날은 영락없이 부부가 다투는 날이었다. 엄마는 생각했다.


‘차라리 고아였으면……. 날 불쌍히 여기는 누군가가 데려다 대신 키워줬으면…….’


반면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이쁨 받는 반장이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진 않았지만, 한국은행에 취직하고 학교의 자랑이 됐다.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할머니(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할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고약한 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노모를 모시고 사는 일은 그 자체로 고된 일이었다. 아빠는 가부장제의 화신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완벽주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닌 아빠는 당시 어린 내가 보아도 별 것 아닌 일에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만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꼭 자신의 엄마 같았다고 한다. 냉정하고, 자주 무시하며, 히스테릭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외롭고, 속상한 마음에 친정엄마(나의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그때 외할머니의 대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네가 좋아서 한 결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 따위 얘기할 거면 전화하지도 마!”

딸깍.


첫 아이는 아들을 낳았다. 나의 오빠이다. ‘아들 사랑’이 극진한 할머니는 엄마로부터 ‘고추 달린 아기’를 빼앗아갔다. 엄마는 자신만의 아기를 갖고 싶었다. 6년 후 내가 태어났다. 하지만 엄마는 할 일이 많았고, 오빠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다시 할머니의 차지가 됐다.

엄마는 몸이 약했고, 외롭고, 우울했다. 아빠는 ‘가장’으로서는 탁월했지만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엄마에게 자주 했던 질문이 있다.


“엄마는 왜 맨날 인상 쓰고 있어?”

“엄마는 왜 활짝 안 웃어?”


엄마는 어두운 밤을 지나는 중이었다는 걸 한참 후에 알았다. 때때로 어두운 밤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어느 낮 시간, 엄마가 길 위에 멍하니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와서 엄마의 다리 뒤 쪽을 툭, 건드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봤는데 택시 기사가 눈을 부라리며 욕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택시 기사는 여러 번 크랙션을 누르며 비키라고 했던 것 같았다. 엄마는 그 직전의 순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매우 유사한 경험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에게 가장 어두운 밤과 같았던 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 학원에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어째서인지 보행자 신호등이 아닌 일반 신호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발을 뗐다. 그리고 블랙아웃. 먼 곳에서 아득하게 들리는 웅성거림과 빵빵대는 소리.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중앙선까지 걸어온 상태였다. 양쪽 차선의 차들이 달리는 속도에 내 머리칼이 흩날렸다. 나는 천천히 뒤돌아 다시 인도를 향해 건너갔다. 그저 멍하기만 했다. 주변의 소리는 귓전에서 웅웅 거릴 뿐, 나를 명료하게 깨우진 못했다. 당혹스러움도, 놀라움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체의 감각을 차단시켰던 게 아닐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도 아침은 찾아오고, 비는 잦아들기 마련이다. 대학에서 극작을 배우고, 연기를 하면서 감각을 서서히 되찾았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질 때 즈음 어떠한 끌림으로 심리 상담을 배우고 청소년 멘토 활동을 시작했다. 엄마의 얼굴에서 생기를 발견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너희 어릴 때로 돌아간다면,
더 잘해줄 수 있을 텐데…….
엄마가 너무 뭘 몰랐어.


말라비틀어진 내면에 한 줄기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이제 됐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원했던 것이 엄마에게 없었다.

하지만 그건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비록 나를 보고 웃어준 기억이 별로 없다 해도,

학교 성적 따위로 죽고 싶은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게 했더라도,

어린 딸에게서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싹을 잘라가 버렸더라도,

오래전, 자신의 엄마로부터 내면화시킨 화살촉 같은 말들을 그대로 나에게 쏘아댔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엄마의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9층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몸을 던질까 망설일 때마다 나를 붙잡았던 건 아주 짧은 순간 경험했던 스냅사진 같은 사랑의 기억들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 간식을 만들고 반갑게 맞아주었던 순간,
연보라색 꽃이 그려진 원단으로 직접 원피스를 만들어 입히곤 뿌듯해하던 표정,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엄마의 치마폭을 휘감아 안겨도 성가셔하거나 밀쳐내지 않았던 기억,
열감기 중 내내 곁을 지켜주던 다정함,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복도 앞에서 기다리던 엄마,
그리고 네 살, 낮잠에서 깨어나 존재의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내 발 뒤꿈치를 깨물고 귀여워해주던 엄마의 눈빛.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에 대한 확신.

사랑받았음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나를 구했고,

생을 지속시켰다.


확신의 증거가 되어주는 것들은 고스란히 내 딸에게 흘러간다. 엄마가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의 행위들 또한, 어렸던 엄마를 경멸하듯 노려보곤 했던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해줬던 것들이다.


스폭 박사는 부모가 아이에게 느끼는 ‘언짢음’을 인정하라고 조언했다. (…) 인정함으로써 그 감정을 해소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p180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미움도 사랑의 일부라는 것이다.
p181



나는 내 딸에게 자주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생기 가득하며 다정하고, 따스하고, 유머러스하며 유능한 엄마가 되리라 다짐했다. 냉정하고, 불행해 보이던 나의 엄마와 정반대인 엄마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산부인과 대기실 내에 비치된 여성 잡지 속에서 봉긋한 가슴에 파묻혀 젖을 먹고 있는 아기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는, 마치 온유함의 여신 같은 엄마의 사진을 최면에 걸린 듯 바라보며 이런 엄마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내가 그런 엄마를 기대했지만 충족되지 못했고, 내 딸의 탄생과 동시에 내가 원했던 엄마로, 스스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융에 따르면 어머니 원형에는 세 가지 기본 특성이 있다. ‘선량함, 열정, 어둠’이다.

대부분의 노이로제 환자에게 있어 ‘심리적 장애의 뚜렷한 원인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진정한 근원은 진짜 어머니보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투사하는 신화적인 원형에서 기인한다.

p86



신화화된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엄마로부터 갈구하는 종류의 사랑은 애초에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내가 지향했던 ‘모성상’은 달성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내 딸이 원하는 엄마에 가까울까?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구적이고, 끝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의 특성상, 그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엄마 자신의 욕구는 꽁꽁 묶어둔 채 차디찬 지하 감옥에 가둬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한동안 나 자신과 관련한 욕구를 모조리 뒤로 미뤄둔 채 ‘엄마’라는 정체성이 내 전부를 차지했던 적이 있었다. 머지않아 두 번째 자살 충동을 느꼈다.


엄마는 차차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시와 수필을 쓰고, 등단을 했다. 한국어 교사가 되어 이주민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반겨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은근하게 쓰라렸지만, 생동감으로 반짝이는 엄마의 눈을 마주하면 나의 미래도 함께 빛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엄마로서의 다른 삶의 방식을 내게 보여줬고,

스스로를 살렸다.

동시에 그 삶은

여전히 나를 키우는 중이다.


내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것이 있다.
결핍과 간극과 공백이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어머니는 내게 다른 것을 주셨다.
아마도, 훨씬 더 값진 것.
그녀는 내게 출구를 주었다.
p29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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