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지향적 인간’의 성찰
별 이유 없이 몸이 무겁고 우울했다.
끝 모를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루 여덟 시간씩 잠을 자도 피곤했다.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절실했다.
그걸 알 리 없는 아이의 귀여운 재잘거림이
귓바퀴를 맴돌다 흩어져버렸다.
성가셨다.
셔터를 내려 스스로를 아이와 차단시키고 싶었다.
엄마로서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빵을 굽기로 했다.
다크 초코 파우더를 듬뿍 넣은
새카만 초코 스콘을 굽기로 했다.
까매진 내 마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향기만큼은 황홀할 테니.
만사가 귀찮았다.
빵을 구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출근 전
아에에게 말했다.
“엄마랑 초코 스콘 만들어놔. 아빠 퇴근하고 와서 먹게.”
만사가 귀찮다고
계속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더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하여 빵을 굽기로 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 잘 풀리지 않았다.
설탕을 버터에 쏟아 섞어야 하는데
실수로 밀가루에 부어버렸다.
대략 15년 된 저울에 자꾸 ‘Err’ 메시지가 뜬다.
짜증이 치밀었다.
예열해 둔 오븐 속에서
언제, 어떤 연유로 넣어두었는지 결코 모를 주방도구가
용암처럼 녹아내렸다.
남편이 넣어둔 것이 분명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이가 유튜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파충류 영상을 보다가
아이패드를 들고 와 엄마도 한 번 보라고 한다.
싫어. 파충류 따위.
그런 나 자신이 싫었다.
연말이 다가와서일까?
다른 사람들은 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여기에 이대로 쭉-
집에 처박혀서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
사실 집이라는 공간을 정말 사랑하는데도 말이다.
스스로 잘 해낸 것들에 대해서
목록을 적어봤다.
한 달에 책 네 권 이상 읽으며 공부하기
매일 다이어리에 일상 기록, 일기 쓰기
새벽 요가와 명상
매일매일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매일 밤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
순항 중인 엄마표 학습
정리, 정돈, 청소
천천히 귀엽게 성장 중인 나의 유튜브 채널
글쓰기
‘우와, 나 잘 살고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다시 공허해졌다.
저런 것들이 없다면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건가?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성취 해내지 못한다면
내 존재는 아무 쓸모가 없는 건가?
내 삶이 이렇게 집 안에서 누군가를 서포트만 해주다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돈을 벌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생기를 띈 얼굴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나를 그려봤다.
그렇게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 같다.
*
브런치도, 유튜브도
세상과의 연결감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어서 시작했다.
모성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정작 당시엔 몰랐지만)
‘좋은 엄마’는 ‘집에 있는 엄마’라고 확신하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했다.
TV광고 속
청순하고 청초한, 하얀색 앞치마를 두른,
아이와 남편에게 늘 다정하고 수용적이며,
요리와 청소에 일가견이 있는,
화사한 표정의 주부들의 모습은
철저히 기획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의 눈 부신 성장 과정을
촘촘하게 목도하고
그 안에서 느낀
가슴 저미게 행복했던 순간들은
그 자체로 영광이었다.
그러나
나는 종종 외로웠다.
공허했다.
답답했다.
우울했다.
그때마다 요가를 하고,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수첩에 글을 끄적이고,
짐을 챙겨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가출이 아니라 여행)
심리 상담을 받고,
각종 자격증을 따고,
수첩의 글을 브런치에 옮기고,
엄마들의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다시 연극을 시작하고,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그러자 아주 조금씩
벽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새로 빛과 맑은 공기와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이를 낳고
돈을 버는 직업을 가지지 않은 채(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수준의 꾸준한 수익을 말한다)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건
그 틈 사이에 입을 대고
간절히 외치는 S.O.S 신호였다.
여기 사람 있어요
*
내가 성취지향적 인간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쓸모지향적 인간‘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가 원하는 성적이 아닐 경우
반복적으로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던 경험은
’사랑엔 조건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만들어냈다.
나는 타인이 인정해 줄 만한 성과를 달성하여
내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악마 같은 인간이라도
나의 쓸모를 인정해 주면
그에게서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쓸모지향적’ 관념은
대한민국 경쟁 사회에서 아주 ‘쓸모’가 있었다.
나는 꽤 칭찬받고 인정받는 청년이었다.
그럴 때마다
세상으로부터 나의 ‘쓸모’를 승인받고,
무언가를 눈에 띄게 ‘성취’해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는 신념이 강력해졌다.
경쟁 사회에서의 ’칭찬과 인정의 쓸모‘가
와장창 깨져버린 건
출산 직후 죽음과 대면했던 경험,
그리고 지난한 돌봄의 시간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의 쓸모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식물인간 상태인 가족의 생명을
어떻게든 연장하고 싶어 하는 사례를
자주 목격한다.
식상한 말이지만,
우리 개개인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든
존재 자체가 기적이고,
고귀하다.
남이 뭐라든,
무엇을 성취했든 못했든
아무 상관없이 말이다.
아,
얼마나 멍청한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건져 올린
삶의 지혜를
까먹고 있었다.
아마 또 까먹겠지.
죽음이 나에게 알려줬던 건
이것이다.
우리 삶에서 진정 소중한 건
타인의 관심과 인정,
학교 성적,
대학 이름,
명품 옷과 가방,
돈이 아니라는 것.(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은 소중하다)
이것들이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하나의 부분이 될 순 있어도
소중한 건 아니라는 것.
정말 소중한 건
서로 간에 나누는 따뜻한 눈빛,
다정한 말 한마디,
일상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사소한 것들,
(예를 들면, 햇살에 아름답게 반사되는 나뭇잎의 빛깔, 선선한 공기의 부드러움, 나무 그늘, 빵 굽는 냄새, 좋은 책이 선사하는 보석 같은 한 문장, 오랜 걸음을 편안하게 인도하는 신발 한 켤레, 작고 여린 것의 온기 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감사히 품을 수 있는 가슴이다.
이런 것들을 다시 떠올리자
다시,
생의 기운이 촛불처럼 피어올랐다.
무언가를 함께 나누고 싶어 시작한
브런치도, 유튜브도
거의 혼잣말에 가깝지만,
뭐 어떤가.
적어도 나 자신과의 대화는
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그 자체로 감사하다.
최근 극단 단원들과 함께 읽었던 책
에바 페더 키테이의 <의존을 배우다>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을 공유하고 싶다.
인지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인 우리는 아이가 무언가 하리라는 기대와 관련해서도 다른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 비록 우리와 치료사, 교사, 그리고 아이의 삶과 연관된 여타 전문가가 우리 아이들에게 계속 기술을 가르치려고 시도하지만, 우리 다수는 결국 사전에 형성된 기대 없는 삶에 감사하게 된다. 기술이나 능력의 증거를 보는 일은 놀랍고 기쁘다.
그러나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냥 존재하는 능력 또한 놀랍고 기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중증 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로부터 얻은 가장 심원한 기쁨의 원천 중 하나는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교육자로 인지장애에 관한 글을 쓰는 데이브 힝스버거(Dave Hingsburger)는 죽음을 마주했던 순간에 대해 적었다. 그는 할 일 목록은 무척 짧은데, 될 것 목록(to-be list)은 매우 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조용하고 선하며, 행복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기. 그저 살아 있고 세상에 있다는 데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귀한 재능이다.
p113-114
사랑하고, 삶에서 기쁨을 끌어내며, 존재의 경이를 배우는 것. 이것이 내가 제의하는, 모든 사람이 성취할 수 있으며 심지어 철학자마저도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삶의 극치다.
p115
아이가 내 뱃속에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나는 아이의 존재 그 자체와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마치 가슴에서 빛덩이가 폭발하는 것 같은 수준의
강렬한 감각이었고, 그 감각은 현재에도 섬광처럼 찾아온다.
그때와 같이,
나는 이제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