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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열 Nov 14. 2017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11월의 맥주, 영국식 페일에일 '비터'의 모든 것

날씨가 부쩍 추워졌습니다.


요즘같이 추운 날씨엔 맥주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추운 겨울보다는 무더운 날씨에 더위를 식혀줄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하겠지요. 하지만 정말 이런 서늘한 날씨에 어울리는 맥주는 없는 걸까요?


영국 사람들은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영국의 날씨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우중충하고 싸늘하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영국에 사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얼마나 맥주를 좋아했었는지, 아니, 영국이 지금의 맥주가 있기까지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안다면, 꼭 더운 날씨에서 시원한 맥주가 연상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버터맥주butterbeer는 진짜 맥주는 아니지만, 영국 사람들의 맥주 사랑을 보여줍니다.


독일, 체코, 벨기에 등 유럽 대륙 국가에 가렸지만, 영국은 맥주의 발전에 매우 큰 공헌을 한 나라입니다. 이미 10월의 맥주 뮌헨 라거에 영감을 준 '밝은 색 맥주'의 시초로 언급된 나라이며, (관련글 :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라거와 대비되는 에일 맥주의 종주국과도 같은 나라가 바로 영국입니다. (관련글 :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애초에 에일ale은 영어 단어니까요.


영국에서 발전해 현재 세계 맥주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싸늘한 11월의 어느 날 따뜻하고 아담한 펍에 걸터앉아 한 모금씩 홀짝거릴 수 있는 기분 좋은 맥주, 바로 영국식 페일 에일English pale ale 혹은 그 별칭 비터bitter를 11월의 맥주로 소개합니다.



안색이 안 좋은 창백한 맥주


먼 옛날,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보리를 볶을 때는 나무 장작과 지푸라기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 연료들에서는 자연히 연기가 많이 발생하는 데다가, 온도를 조절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보리맥아는 까맣게 타고 맥주는 어두워지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설탕을 태우면 뽑기가 되는 것 같이, 효모의 먹이가 되어야 할 당 성분이 조금씩 익어서 카라멜 향이 나는게 보통이었습니다.


이보다 현저히 밝은 맥주를 만들게 된 것은 16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됩니다. 1642년, 영국 더비셔Derbyshire 지방에서는 석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코크스coke라는 연료(콜라 아닙니다)를 사용해 보리를 볶아 보았는데, 기존의 연료에 비해 연기도 덜 나고 훨씬 밝은 색깔의 맥아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래봐야 옥수수 섞은 노오란 버드와이저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맥주의 색깔에 커다란 문화충격을 받고 창백하다pale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이릅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렇게 보리를 가지고 만든 발효주를 에일ale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에일은 특정 스타일의 맥주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맥주'라는 단어 그 자체입니다. 당시 영국에 라거 맥주는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새로 만든 그 '창백한 맥주'의 이름은 페일 에일pale ale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맥주에 홉hop을 넣는 새로운 방법이 유럽 대륙에서 도입되어 영국으로 건너옵니다. 맥주에 쓴 맛을 더해주는 홉이라는 식물을 페일 에일에 넣었더니 그 맛이 기가 막히더라! 라는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홉이 들어간 이 맥주들을 기존의 에일ale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가 바로 beer라고도 합니다.


코크스로 볶아서 밝고, 홉이 들어가 쓴 페일 에일은 그 전까지 영국에서 가장 흔하게 마시던 포터porter (해리포터 아닙니다) 맥주와 굉장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보리를 지푸라기로 태워서 매우 어두운 포터는 잘못 볶은 커피처럼 탄 맛이 났을 뿐만 아니라, 맥주에 효모가 미처 발효시키지 못한 당이 많이 남아있어서 꽤 달았습니다. 그에 비해 새로 나온 이 창백한 맥주는 단 맛이 덜하고, 대신 홉의 영향으로 쓴 맛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맥주는 쓰다는 뜻의 비터bitter, 혹은 bitter ale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페일 에일은 처음에는 그다지 대중적인 맥주가 못 되었습니다. 새로 나온 첨단기술로 만든 맥주니 당연히 비쌌겠지요. 하지만 산업혁명 즈음 석탄이 매우 흔한 연료가 되면서 이 맥주도 점차 대중성을 가지게 되었고, 오랫동안 영국 맥주 시장을 독차지했던 포터와 어깨를 견주는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IPA의 발명


대영제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만들어냅니다. 인도는 그 중에서도 단연 소중한 식민지였지요. 인도에는 현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에서 건너간 상인들, 불쌍한 군인들을 포함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나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도는 너무 더워서 맥주를 양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도에서 맥주를 먹으려면 영국에서부터 배달해야 하는데, 영국에서 인도까지 배를 타고 가려면 대서양을 세로질러 아프리카 남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인도양을 통해 북쪽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적도를 두 번이나 넘는 동안, 맥주는 당연하게도 상해버렸습니다. 먹고 살려고 인도로 건나간 상인들, 군인들, 그리고 몇 달을 배에서 보내야 하는 선원들까지, 맥주를 못 먹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인도로 가는 길.jpg (http://www.gutenberg-e.org)


조지 호지슨Hodgson이라는 사람은 런던의 Bow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1700년대 중반, 이제 막 대중화된 페일 에일을 만드는 몇 곳 중 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과 미생물의 활동을 억제하는 알코올이 많으면 맥주가 인도까지 가는 동안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맞습니다.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 옥토버페스트 맥주, 메르첸을 만든 바로 그 원리입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효모가 알코올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보리를 많이 넣었고, 남는 당이 없도록 끝까지 발효시켜 단 맛은 줄이고 탄산은 높였습니다. 그리고 홉은 많이 들어가 매우 쓴 맛의 IPA가 만들어졌는데, 이 맥주는 계획대로 인도까지 배달되는 동안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새로운 맥주가 맛있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인도까지 맥주가 배달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호지슨은 홉과 알코올이 많이 들어가
인도까지 수출해도 상하지 않는 IPA로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호지슨의 성공적인 IPA 수출 (Webster 2015)



악덕 양조가의 최후


얘기는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조지 호지슨이라는 사람은, 식민지와 무역하는 제국주의자답게, 지독한 상술로 자기 이득을 챙겼습니다. 원래부터 큰 양조장을 운영하던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생산하는 IPA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인도 맥주시장을 장악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맥주를 인도에 수출하려고 하면 물량을 풀어 가격을 낮추고, 경쟁자가 없을 때는 가격을 확 높여 돈을 버는 식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의 맥주 가격은 쌀 때와 비쌀 때의 차이가 10배나 날 정도로 요동쳤습니다. (Tulloh 1829)


보다 못한 동인도회사의 고위 직원 마조리뱅크Marjoribanks는 반드시 호지슨에게 빅엿을 먹이겠노라고 결심하고, 1822년의 어느 으슥한 저녁 맥주계의 재야의 고수를 찾아갑니다.



위기에 처한 버턴


버턴 어폰 트렌트Burton upon Trent라는 영국적인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도 여느 마을처럼 먼 옛날부터 맥주를 만들며 살았습니다. 물론 상면발효하는 에일이었고, 보리를 타지 않게 볶지 못해 당연히 까맸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만들던 맥주는, 무진장 많은 보리를 넣어 굉장히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가진, 몹시도 단 맥주였습니다.


얼마나 보리를 많이 넣었냐면, 정확한 레시피는 시대에 따라, 또 같은 마을 안에서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달랐겠지만, 1824년 출판된 "Young brewer's monitor"라는 책에 따르면 발효를 위해 맥아를 물에 녹인 맥아즙wort의 밀도가 1.14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를 오리지널 그래비티라고도 합니다.) 물론 물의 밀도는 1이고, "3배 진한 드럼세탁기용 세제" 밀도가 1.1 정도 됩니다. 이쯤 되면 보리를 얼마나 꾸덕꾸덕 녹인 물을 가지고 양조를 한 걸까요. 그렇게 만든 맥주의 알코올 도수는 10~12%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대대로 주당들이 살았던 건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몸을 따뜻하게 데워줄 맥주를 만들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버턴 마을의 이 맥주는 지역 특산품으로 꽤나 유명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위에서 코크스 연료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언급된 더비셔 지방의 바로 아래 위치합니다. 이러한 이점 때문에, 버턴의 에일은 1700년 전후에 이미 런던에 진출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등, 영국 에일 맥주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코크스 연료를 처음 사용한 영국 중부의 더비셔 지방. 그리고 그 아래 버턴어폰트렌트가 보입니다. (Google maps)


그런데 이 버턴 에일Burton ale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 황제였습니다. 추운 러시아에서 맨날 보드카만 먹다보니 이 달고도 도수 높은 맥주가 쏙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버턴에서는 적극적으로 러시아와의 무역을 추진했고, 버턴의 맥주 생산량의 70%를 러시아와 인근 발틱해 연안에 수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Protz 2011)


하지만 1700년대 후반, 영국과 러시아의 사이가 나빠져 버턴 맥주에 막대한 관세가 붙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 대륙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1806년 영국과의 무역을 일절 차단합니다. 대륙봉쇄령이라고도 불리는 베를린 칙령입니다.


당장 돈줄이 끊겨 전전긍긍하던 버턴 사람들에게, 런던에서 구세주가 찾아옵니다.



버턴, 에일을 평정하다


동인도회사의 마조리뱅크는 버턴에서 에일을 만드는 새뮤얼 알솝Allsopp과 저녁식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잘 들어요. 당신들 맥주를 인도에 수출할 수가 있어요. 인도에선 맥주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맥주를 인도로 수출하기만 하면 절대 망할 수가 없어요. 지금은 호지슨이라는 사람이 꽉 잡고 있는데, 인도 상인들은 다 호지슨을 싫어해요. 하지만... 당신들 맥주는 너무 달고 도수도 높아요."


그리고 알솝에게 호지슨이 만든 IPA를 한 병 건네줍니다.


"이게 그 인도 맥주라고요? 만들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아주 잘 됐군요."


버턴의 맥주 고수들이 이 IPA를 흉내내는 데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알솝과 버턴의 또 다른 맥주 고수 배스Bass는 1822년 말, 호지슨이 한 것처럼 밝고 쌉쌀한 IPA를 만들어냅니다. (배스Bass의 양조장은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석고 (decorarconarte.com)


버턴의 맥주에는 버턴 사람들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방의 물입니다. 버턴 지방의 물은 황산염, 황산칼슘, 즉 석고를 많이 함유하고 있었습니다. 물에 들어있는 황산염은 홉의 쓴 맛을 날카롭게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효모의 작용을 도와 효모가 맥아즙에 있는 등을 남김없이 발효시켜 덜 달고 탄산은 많은 맥주를 만들게 해 줍니다.


황산염 가득한 버턴의 IPA는
질적으로 호지슨의 IPA를 능가했고
곧 인도 맥주 시장에서 우위를 점합니다.



영국식 페일 에일의 완성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39년, 인도로 IPA를 수출하려던 선박이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배에서 나온 IPA는 경매를 통해 영국 시장에 풀리게 되는데... IPA를 처음 맛 본 영국인들은 그 강렬한 쓴 맛에 마약과도 같은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IPA는 인도 뿐만 아니라 영국 시장에서도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주석 참조)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와 비스킷 등 기호식품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은 간식처럼 가볍게 홀짝이기 위해 약간은 덜 센 맥주를 찾게 되었고, 동시에 영국에서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에 더 높은 주세를 부과합니다. (여담이지만,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주세를 알코올 도수에 비례하게 책정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술의 용량에 비례해 세금을 매기기 때문에, 도수 높은 소주가 가격경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이에 따라 IPA보다는 덜 쓰고 도수도 낮은 방향으로 인기가 옮겨갔고, 이것이 바로 지금의 영국식 페일 에일, 비터bitter 맥주입니다.


풀러스(Fuller's)의 비터 맥주, ESB.


한편,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화학자들은 버턴에서 만든 IPA가 유난히 맛있었던, 시어머니도 몰랐던 비결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그 비결을 응용해, 아무 물에나 석고 덩어리를 넣으면 황산염이 많아져 버턴에서 만든 것처럼 맛있는 페일 에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이렇게 맥주 양조수에 석고 덩어리를 넣는 행위를 버턴화Burtonisation라고 부릅니다.



페일 에일에도 등급이?


코크스라는 연료를 사용해 창백해진 에일, 인도에 수출하기 위해 쓰고 강한 에일, 황산염이 가득한 버턴의 진한 에일... 이토록 오랜 역사를 거쳐 정착한 페일 에일, 혹은 비터라는 이 영국 맥주는, 홍차와 비스킷과 어울릴 만한 차분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특징입니다. 또, 영국 품종의 홉에서는 흙이나 허브 비슷한 향기가 나 요즘 유행하는 에일 맥주의 시트러스한 향과 대비되며, 적당한 양의 부드러운 탄산과 섞여 기분 좋은 쌉쌀함을 선사합니다. 에일 맥주 특유의 과일 향도 살짝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극적이지도 심심하지도 않으면서 도수가 높지 않아 가볍게 수다떨며 홀짝거릴 수 있는 음용성, 그리고 쓴 맛에 가리지 않은 진득한 보리맥아의 고소한 향이 가장 큰 특징으로 손꼽힙니다.


이 영국식 페일 에일 중에서도 알코올 도수와 그에 비례하는 맛의 진한 정도를 기준으로 세 가지의 하위 분류가 있습니다.


1. Standard / Ordinary Bitter

셋 중 가장 낮은 도수, 적은 맥아와 홉 함량, 탄산을 가진 가장 싱거운 비터입니다. 아무 수식어도 없이 'bitte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거나, 표준standard 혹은 평범한ordinary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명확한 분류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3~4도의 알코올 도수를 가진 비터 맥주가 이에 해당됩니다.


영국 아저씨들은 퇴근하는 길에 펍에 들러 가볍게 한 모금 하고 갈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맛있는 수입맥주를 먹어보겠다고 고르기에는 약간 싱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상품으로는 Fuller's Chiswick Bitter, Young's Bitter 정도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2. Special / Best / Premium Bitter

Standard나 ordinary보다는 조금 업그레이드된 수식어를 가진 중간 단계입니다. 딱히 특별하고 우월한 맥주라기보다는 맥주 회사에서 좋아 보이려고 붙이는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영국식 페일 에일의 표준이라고 볼 수 있는 단계인데, 이전 단계에 비해 맥아의 단 맛도, 홉의 쓴 맛도, 탄산도 알코올도 약간 강화되었지만 페일 에일 자체가 워낙 가볍고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다지 세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알코올 도수는 4~4.5도 내외로 평범합니다.


여러 가지 상품이 이 단계에 해당되지만, 이 분류를 대표하는 맥주는 뭐니뭐니해도 Fuller's에서 만드는 런던 프라이드London Pride입니다. 영국식 페일 에일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높은 평가를 받는 명실상부한 비터 맥주의 대표작으로, 국내의 크래프트 맥주 전문점이나 대형마트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미국 시카고의 양조회사 구스 아일랜드Goose Island에서 만드는 Honker's Ale이 있습니다. 구스 아일랜드는 2016년 12월 강남에 '구스 아일랜드 브루하우스'를 짓고, GS25 편의점에 홍커스 에일을 포함한 대표 상품을 납품하는 등 국내 시장 공략에 열심입니다. 접근성의 이점은 있지만, Fuller's와 같은 영국 맥주에 비해 영국 특유의 풍미와 분위기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영국 맥주의 자부심, 런던 프라이드



3. ESB : Extra Special Bitter

말 그대로 한 층 더 특별한 세 번째 단계입니다. 4.5~6도 정도의 알코올 도수와, 한 층 강화된 깊은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ESB라는 표현은 런던 프라이드를 만드는 영국의 Fuller's 양조장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이 곳의 ESB 맥주인 Fuller's ESB는 ESB라는 스타일을 만든 작품이자 지금도 이 스타일을 대표하는 상품입니다. 그리고 이 양조장에서 ESB라는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이 양조장만이 맥주에 ESB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영국의 다른 양조장들은 ESB에 해당하는 페일 에일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Fuller's의 상표권이 미국까지 미치지는 못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ESB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Redhook에서 만드는 ESB가 있습니다.


그 외에, 영국 Wychwood 양조장에서 만드는 Hobgoblin이라는 맥주가 있습니다. 홉고블린은 어느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 이름이라고 하는데, 중의적으로 비터 맥주의 중요한 요소인 '홉'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고급스럽기보다는 다소 거친 맛이지만, 고소하게 볶아 비스킷 맛이 나는 맥아와 차분한 향의 홉 모두 영국스러움을 잘 살린 맥주이며, 대형마트에서 비교적 쉽게, 그리고 싸게 구할 수 있는 맥주입니다.


도깨비가 그려진 홉고블린 맥주. "Traditionally crafted legendary ruby beer"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사진 : delhipedia.com)



이 사고는 1839년이 아닌 1827년에 일어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1869년 쓰여진 한 책의 실수에서 비롯한 것으로, 1839년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Cornell 2015) IPA는 1839년 이전에도 영국 시장에 제한적으로 있었지만, 이 사고로 인해 보다 대중적으로 풀렸다는 설명이 보다 정확합니다.




한 달에 한 종류씩, '이 달의 모범맥주'와 함께 진하고 시원한 맥주 이야기를 배달합니다.

이 시리즈는 대한민국 공군 교양카페 <휴머니스트>에 <이 달의 모범맥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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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옥토버페스트맥주 메르첸 :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10월, 뮌헨 둥켈과 헬레스 :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참고문헌
Cornell, M. (2015) "The IPA shipwreck and the night of the big wind" http://zythophile.co.uk 
Protz, R. (2011) "Burton ale: Back from the dead"
"The young brewer's monitor", (1824) London : Baldwin, Craddock and Joy.
Tulloh & Co. (1829) "Circular on the Beer Trade of India"
Webster, Ian. (2015) "Ind Coope & Samuel Allsopp Breweries: The History of the Hand", Amberley Publishing
커버사진 : Jorge Ro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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