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산수유 예찬
봄의 노란 전령(傳令) - 산수유 예찬
겨울 가시 돋친 삭풍 속에서도 그대,
기어이 노란 등불을 켜셨구료
아내의 고단한 재활길 배웅하고 걷는 풍산 숲 길
마른 가지 끝에 걸린 그 빛이 하도 고와
시린 눈동자에 가만히 담아봅니다
작년의 붉은 열매 비우지 못한 채
새봄의 노란 약속 서둘러 꺼내놓은 건
얼어붙은 대지 위로 흐르는 멈출 수 없는 생명의 노래겠지요
휠체어 바퀴 자국마다 스민
우리의 끈질긴 기도를 닮았습니다
겨울을 견딘 나무가
가장 먼저 꽃을 피우듯
고통을 지켜낸 사랑이
가장 깊은 향을 내듯
풍산 숲길,
벙글기 시작한 꽃망울 하나가
내일의 걸음이 되어 툭, 툭 터집니다
원자폭탄도 그 어떤 무기로도 막을 수
없는 생명력!
보소서,
생명은 이토록 귀하고
우리 곁의 봄은 이토록 가깝습니다
-하남 풍산 숲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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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에서 건네는 노란 약속
겨울의 끝자락, 하남 요양병원 인근 풍산 숲길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지만
발끝에 닿는 흙의 감촉에는 미세한 온기가 숨어 있습니다.
내 손으로 밀어주는 휠체어에 의지해 재활치료실로 향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홀로 걷는 길.
마음 한구석에 남은 무거운 책임감과 애틋함을 안고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하는 존재를 만납니다.
바로 노란 산수유입니다.
앙상한 가지 끝에 맺힌 기적
지난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붉게 말라버린 열매 곁으로,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미는 노란 꽃망울들을 봅니다.
도대체 저 가냘픈 가지 어디에 저토록 단단한 생명력이 숨어 있었을까요.
얼어붙은 땅속에서 수분을 끌어올리고, 살을 에던 칼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지켜온 저 작은 꽃망울은 단순한 식물의 성장이 아니라
하나의 '승리'처럼 느껴집니다.
기다림이 빚어낸 찬란한 인내
산수유는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들보다 먼저 깨어납니다.
남들이 봄을 기다릴 때,
산수유는 스스로 봄이 되기로 결심한 듯 보입니다.
겉보기엔 그저 멈춰 있는 것 같았던 겨울 나무가
실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꽃을 준비해 왔음을…
저 벙글기 시작한 노란빛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재활 또한
저 산수유의 겨울과 닮아 있을지 모릅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 보이는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생명의 안쪽에서는 끊임없이
회복을 위한 치열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산수유가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더 선명한 노란빛을 내뿜듯,
지금의 인내는 반드시 찬란한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생명의 존귀함, 그 경이로운 시작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점점이 박힌 노란 꽃망울을
가만히 응시해 봅니다.
죽은 것 같던 나무에서
다시금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것을 보며,
우리는 잊고 있었던 진리를 깨닫습니다.
생명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가장 약해 보이는 순간에도
가장 강인한 힘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풍산 숲길에서 만난 산수유는
오늘 저에게 나지막이 속삭입니다.
"봄은 이미 당신 곁에 와 있습니다"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