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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나이 Feb 04. 2022

친정엄마의 친정엄마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다.



"엄마 가는 길에 외할머니 보고 갈까?"

"그럼 좋지. 안 그래도 곧 가볼랬는데"


김해에 있는 친정에 들려 엄마를 모시고 경기도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에 웬일인지 외할머니를 뵙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봬야 한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일찍 길을 나서 여유가 있을 때 들려야 할 것 만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친척집이나 할머니 댁을 거의 가지 못했기에 벌써 두 돌이 다돼가는 둘째를 보여드리지도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또 코로나를 핑계로 할머니를 뵙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가 될 것만 같기도 했다.


 95세가 넘으셨지만 허리도 굽지 않고 정정하게 걸어 다니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남편이 정말 할머니가 90세가 넘으신 게 맞냐고 되물어볼 정도로 스스로 생활도 가능하시고 건강하셨다. 하지만 그리고 며칠 뒤 발을 잘못 디디셔서 크게 다치셨단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못 일어나신 외할머니는 며칠 전에 외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셨다.


"엄마 외할머니 보러 안 가도 돼?"

"가야지. 근데 애들이 눈에 밟히는 데 우짜노, 엄마도 내리사랑이라고 여기 먼저 와지는데.. 이모도 그렇다더라. 우리 엄마 또 삐지시겠네."


자식 셋을 다 키우신 우리 엄마는 시간이 될 때마다 외할머니를 만나러 갔는데 우리 아들들이 태어나고 내가 일에 복직하고 나니 어린이집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둘째와 아픈 큰애가 눈에 밟혀 올라오셨다. 그리고는 외할머니를 보러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엄마는 지금도 본인이 안 계시면 아이들이 기관에 오래 있어야 하거나 내가 휴가를 내야 하는 걸 안타까워하신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외할머니는 코로나 때문에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할 때만 가능한 제한된 면회를 빼고는 만날 수가 없었고, 그마저도 많은 형제분들이 계셔서 엄마는 외할머니를 거의 뵙지 못했다.


그리고 임종직전 갑작스레 병원에서 연락이 왔지만 경기도 계신 엄마만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셨다.


결혼 전 아니 아이를 낳기 전 까지는 '친정엄마'라는 단어가 이렇게 사무치는 단어인 줄 몰랐다. 마치 혼자 자란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고, 늘 걱정이 많은 엄마에게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타박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아니 사실 아직 엄마 앞에서는 어린아이지만 그동안 어른인 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나의 보호자이자 기댈 곳이고 거센 비가 쏟아 내려도 잠시 피해 갈 수 있는 처마 같은 존재이다.


아마 아이를 낳고 기른 지 40년이 다 돼가는 우리 엄마한테도 '친정엄마' 그런 존재이지 않았을까.

내가 아니었으면 엄마가 친정엄마를 더 자주 뵐 수 있지 않았을까. 임종 직전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발인을 기다리며 장례식장을 지키다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들어오지만, 엄마는 원망은커녕 재접 근기(18개월~36개월)에 접어들어 ‘엄마 껌딱지’가 된 우리 둘째를 걱정하신다. 그리고 그저 그게 삶이라고 만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보다 아들들을 먼저 챙기는 내 모습에 엄마가 서운하지 않으실까 싶을 때가 있는데 엄마는 그게 당연한 거라 말한다.

이모들도 엄마도 '친정엄마'지만  '친정엄마'보다 자식 손주를 먼저 챙기게 되더라고 그게 세상 이치라고 말하신다.


나는 아직 엄마나 이모들이 말하는 세상 이치나 삶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딸이 없다. 그래서 나중에 ‘친정엄마’가 될 순 없지만 우리 아들들이 크고 나면 엄마의 마음을 1%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그저 지금 나에게 ‘친정엄마’는 내가 쉬어 갈수 있는 존재라는 것 만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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