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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나이 Sep 09. 2021

여자에게 안 좋은 직업

그렇다고 남자가 될 순 없잖아?


 초등학교 때 학기 초가 되면 취미, 특기, 장래희망 가족사항을 적는 흔한 가정통신문에 '부모님이 바라는 직업'을 적는 란이 있었다. 전업주부이신 우리 엄마는 항상 '유치원 교사, '초등학교 교사'를 적어 주셨다. 그러다 내가 중,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엄마, 왜 내가 교사가 됐으면 좋겠어?"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잖아." (외갓집의 몇몇 분이 초등교사시다.)

"다른 건 여자가 하기 안 좋은 직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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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부모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라는 건 일하면서 출산휴가가 보장되어야 하고, 출퇴근이 빨라서 육아와 살림에 구멍을 내지 않고, 육아휴직이 길어 아이를 충분히 키울 시간이 있고, 다시 복직해서도 정년에 보장되어 있는 직업이다. 거기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이니 육아와 교육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닐 것이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을 수 있는 직업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여자에게 직업이란 자아실현이나 성공 승진과 관련 없이 '육아와 살림에 영향을 적게 주면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라는 해석이 아닐까.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살아가며 꼭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것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가진 직업으로 교사라는 직업 내에서도 많은 성장이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이루어 내는 꿈과 이상이 있겠지만 아직 많은 어른들 눈에는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틀에 갇혀 버린 것 같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보다는 존경받는 직업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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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나는 여자의 비율이 10%도 안 되는, 다시 말해 여자에게 '안'좋은 직업인 엔지니어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대부분 남자이고, 50여 명의 우리 팀 내에서는 유일한 여자이다. 사실 나에게 '엔지니어'라는 직업은 '나'라는 큰 틀 아래에 존재하는 '엄마', '작가', '아내', 와 같이 하나의 캐릭터일 뿐이다. 다만 직업이기 때문에 여러 역할 중에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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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라는 직업이 여자에게 '안'좋은 직업인 이유는 뭘까. 여자들이 많이 선택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많다. 우선 이공계 대학을 진학하는 여학생의 수가 적다. 더 옛날에 비해서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바닥의 남초 사회이다. 또 반도체 라인을 출입해야 하고 야근도 있고, 무엇보다 선례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엔지니어라는 직업을 좋아한다. 장비에서 쏟아진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도 좋고,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거나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도 좋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선례가 되었고, 아이를 키우면 맞닥뜨리는 수많은 고비를 겪으며 직업을 지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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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차 엔지니어인 나는 아들 둘을 키우며 여전히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애들 키우면서 다닐만한 곳인 가봐?'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남편은 이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 중이에요~'.

아마 아이의 정서적 안정감/현모양처의 꿈이 있었다면 이 직업을 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자에게 좋은 직업'보다는 '나에게 좋은 직업'을 택했다. 왜 남자에게 좋은 직업은 없나요? 여자는 아이를 잘 키우는 직업이 최고인가요? 같은 식상한 질문은 더 이상 던지지 않는다. 내가 남자가 될 수도 없고, 사람들이 수십 년을 받아들여온 고정관념을 한 번에 바꿀 자신도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갈 뿐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엄마들이 엄마로서, 여자로서 좋은 직업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직업'을 한 번쯤 꿈꿔봤으면 하는 기도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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