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이직상담사의 70일의 유럽배낭여행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가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렵다고 해야할까. 가우디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가우디 관광가이드를 신청하여 까사바트요, 까사밀라, 가우디성당 등은 외부를 보며 설명을 듣고 그 중 구엘 공원은 내부로 들어간다.
여행기간동안 구엘공원은 두번이나 간다. 관광팀으로 그리고 홀로. 나중에 다시 올 건데 그 때 혼자 와서 여유롭게 도시락을 먹어야지. 다들 시간이 없으니 한 번밖에 못 오는 곳인데 바르셀로나 일정이 일주일이 넘는 나로선 마음에 드는 곳을 재방문하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관광팀과 다니며 우쭐했다.
날씨가 화창하니 사진찍기 좋은 날씨인데도 ‘나중에 와서 여유롭게 찍지 뭘.’ 이런 생각으로 사진도 찍지 않다가 ‘다시 오는 날, 흐린 날씨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뒤늦게 몇 장 찍지만 이 땐 몰랐다. 며칠 후, 날씨가 어떻게 될지 상상도 못했으니까. 구엘공원을 방문하기에 딱 좋은 일정을 만들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린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구엘공원을 만난다. 날짜와 시간이 예약된 티켓이라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도 없는데 비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공원을 보고 싶은 마음과 따뜻한 집(호스텔)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이 싸운다. 이 비를 맞으면서 관람이 가능하겠어? 우선 버스를 타고 출발해본다. 날씨 예보는 소나기였는데 곧 뇌우라고 바뀐다. 가도 되는 걸까? 구엘공원 문지기들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않는다. 이정도 비에도 들여 보내주다니 신기한데.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은 이런, 표지판이 없다! 한국은 여기저기 큼지막하게 있는데 이곳은 표지판 찾기가 어렵고 있어도 간단하다. 게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구엘공원 지도에 접속하라고 하는데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아서 어플을 다운받기도 어렵다. 지도를 사진으로 저장하지만 너무 단순해서 내겐 도움이 되지 않네. 쭈욱 가면 나오겠지 라는 생각으로 앞으로 간다. 친절하고 섬세한 대한민국 만만세. 내가 편리함을 모르고 살았구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 빗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며칠 전, 투어로 한 바퀴를 돌 때도 생각했지만 구엘공원은 공원이 아니라 산이다.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발걸음을 그냥 옮기면 곤란한 산 같은 공원. 숲길을 따라 이쪽 저쪽 가다가 으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어디든 사람이 보이면 붙어야겠다고 이대로는 큰일나겠다 싶어서 중국인들이 모여있는 관광팀 뒤쪽에 슬쩍 따라붙지만 사진을 찍다보니 일행을 놓친다. 이 비에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을 모르겠는데 다시 외톨이가 되다니. 겁이 난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땅의 흙이 패이고 물과 함께 황토가 쓸어져 내리는데 재밌는 생각이 든다. 이 장면을 찍어놓았다가 나중에 투어왔던 팀원에게 보내드리면 신기하시겠는 걸, 화창한 구엘공원이 이런 표정도 있다고 보여주면 좋겠는걸.
그런 상상을 하니 잠시라도 흥겨운 마음이 들어서 제주도의 야자수 심어놓은 것 같은 풍경 속에 흥얼거리면서
우중 산책, 나무들도 멋지고 한국의 산자락에서 하산하는 기분이잖아. 여기에 바가지 몇개 있으면 한국의 약수터 풍경인데. 철봉 몇개만 있어도 놀이터 풍경인데, 이런저런 말들을 쫑알거리며 10분간 영상 촬영할 때는 흥겹고 좋다.
구엘공원을 궂은 날씨에 구경하는 일이 흔하진 않잖아. 그래, 이렇게 흙탕물이 밀려오는 상황은 흔하지 않지. 빗소리가 잦아들고 영상을 촬영하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히면서 심상치 않은 기분에 촬영을 멈춘다.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었는데도 우비를 뚫고 비가 들이친다.
흙탕물과 모든 비를 운동화로 받아내니 자주빛 운동화가 검정색이 되고 마음도 먹빛이 된다. 어두워져 가는 회색빛 하늘과 무서울 정도로 내리는 비를 보니 길을 잃고 다음날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미아가 되는 나를 상상하니 기도가 절로 나온다. 제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세요. 길을 찾게 해주세요.
이대로는 곤란해. 당 떨어질 때 먹으려고 (엑상 프로방스에서 구매한 )칼립스를 챙겨온 몇 개를 먹으니 정신이 든다.
안개가 내린 길, 원점으로 돌아가면 방법이 보일거야. 원점으로 가는 길을 겨우 찾아 직원에게 물어물어서 드디어 내가 원하는 구엘공원의 광장에 이르고 사람들을 발견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이제 혼자가 아니다. 며칠 전에 본 햇빛 쨍하던 광장은 거울처럼 빛났는데, 눈 앞에 펼쳐진 빗물 속 구엘광장은 우중충하고 멜랑꼴리하다. 역시 겪어야 안다니까… 안개 낀 바르셀로나 도시와 구엘 광장을 감상하고 공원의 마지막 중요 지점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짙은 회색빛 하늘 사이로 푸른빛과 햇빛이 반짝인다. 구름 뒤에 숨어 있었구나!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사물에 빛이 돌면서 안개만 가득하던 세상이 밝게 변한다. 황토가 쏟아지는 빗길을 홀로 걸으면서 미아가 되는 게 아닌가 고민했던 내게 하늘이 말한다. 힘들었지? 괜찮아 하나님께서 내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이 차오른다. 한국에서 가져온 고민이 더 이상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으리라 예감이 든다.
아, 해결해주시겠구나.
인생에 가끔 폭우가 내린다. 이게 과연 되겠어.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에 갇힌 것 같은 순간들.
나의 첫 책 <내게 맞는 일을 하고 싶어>가 W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가 파기 당했을 때 일이다. MZ 세대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고 그들이 재밌게 보려면 원고를 고쳐야 하는데 출판사 내부의 모든 프로젝트가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원고를 고칠 수 있도록 내게 가이드해 줄 인력이 없으니 책출간 계약은 지킬 수 없단다. 두달간 행복하게 최종원고를 수정했던 기쁨이 순식간에 말라버렸고 정신이 멍해졌다. 무너지는 멘탈을 붙잡으면서 이 어려운 말을 내게 건네는 편집자님을 오히려 걱정해드린다. 쓰린 가슴을 안고 집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직후에 멘탈이 나가는 일들이 벌어진다. 일하고 있던 L대에서 학교사업비가 없어서 상담을 더 이상 맡길 수가 없다고 연락이 온다. 일자리가 사라진 거다. 남편 또한 일하던 곳에서 일자리를 잃는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몰려오는데, 멀쩡하던 핸드폰이 떨어져서 액정이 깨진다. 폰을 조심스럽게 사용하기 때문에 단한번도 폰이 깨진 일이 없는데 말야. 게다가 폰이 낡아서 액정을 바꾸기보다 폰을 바꿔야 하는데 나도 남편도 돈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프린터기가 고장난다. 원고를 노트북 화면으로 보기 보다 인쇄해서 최종적으로 수정하고 다시 써야 다른 출판사에 책에 쓸 원고를 타진할 수 있는데 답답한 상황이다, 인근 복사집에서 대량 인쇄를 한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하나님 뭘 주시려고 이렇게 꼬아주시는 거에요? 결국 주실 거면서. 뭘 이렇게 다 안되게 하시는 거에요. 정말 웃기는 일은 프린터기가 C출판사와 책 계약이 성사된 이후로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되돌아보면 엄청나게 꼬인 시간이었던 셈이다. 어차피 다 잘 되도록 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힘들어도 허허허 웃기네. 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출판 계약이 깨진 날, 딱 하룻동안 침잠하고 다음날 바로 일어났다. 아는 작가님께서 감정이 무너져서 쉽지 않았을텐데 나의 오뚜기 정신에 대해 대단하다고 놀라워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놓는다)이라는 걸 아니까 버티고 앞으로 나갔을 뿐, 그래도 쉽진 않았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꽉 막힌 굴이 아니라 굴곡진 터널이었을 뿐, 터널이니까 나올 수 있는 길이 있더라. 수채구멍에 빠진 것 마냥 비루하고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 순간을 견뎌내면 이렇게 맑게 개이는 순간이 오잖아. 그런 시간을 꿈꾸는 것도 사치인데 그 사치가 신기하게도 현실이 되더라. 그럼 오늘 처럼 눈물을 그렁거리며 바보처럼 웃겠지.
손을 가슴에 꼬옥 안고 중얼거린다. 괜찮아. 다 잘 될거야.
(그리고, 검정색이 된 신발 때문에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