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글루스를 아시나요?
이십대 초중반, 매일이 즐거움과 불안의 연속이던 그 시절의 나는, 상처받았던 어느 날과 행복했던 크리스마스 날, 그리고 아무 날도 아닌 그저 울적한 날, 익명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이글루스에 들러 내 젊은 날의 연대기를 채워 나가곤 했다. 얼굴은 없고 감성만 있는 이들의 소통이 일렁이던 그 곳에서 단정한 글로 채워지던 한 분의 이글루를 동경했다. 대학생이던 나에겐 커리어우먼인 그 분이 일도 잘 하고(난 당장 취뽀가 막막한데) 연애도 잘 하고(난 과 CC하던 놈이랑 헤어진 이야기 쓰고 있는데), 해외여행도 많이 가고(이건 그냥 언감생심), 그야말로 워너비 언니야였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그 분의 피지섬 여행기가 어렴풋이 떠오르면서, 그 글을 통해서 상상했던 피지섬의 청량한 이미지가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몰디브에 도착한 후 생각했다. 이 곳이 나에게는, 그 때 그 분의 피지섬이로구나.
여느 여행지와 다르게 몰디브는 동선을 짤 필요도, 가봐야할 관광지를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아주 아주 고심해서 내 눈앞에 그려질 바다를 보이게 해줄 단 하나의 숙소만 택한다면, 그것이 나의 몰디브 그 자체가 될 뿐이다. 우린 거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테니까.
내가 좋아했던 그 분의 나이가 되어서 또 삼십대의 삶을 살아 보니, 이 또한 치열했던 이십대를 지나도 늘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구나, 현대인들아 모두 대견하다, 어떻게 매일 공과금이랑 대출금 안 미루고 내고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 맡긴 것 가지고 오고 영양제 챙겨먹고 그렇게 사니,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매일 지하철에 몸을 싣니, 싶은, 그저 고단한 것에 불과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해도 마음이 놓이는 지상천국은 몰디브에 있었다. 다른 여행처럼 자잘한 선택과 고민에 대한 스트레스마저 없었으니, 천성이 게으른 나에겐 이것이야말로 몰디브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되었다. 아, 이것이 진정한 휴가구나.
우리는 매일 꼬박꼬박 조식을 먹으러 나갔다. 한국인의 시그니처 김치볶음밥을 시켰다. 바닥에 뚫린 그물망을 통해 바다를 보았다. 이걸 위해 그동안 우리 열심히 살았다 여보 그치,를 매일 되뇌었다.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도착한 후 숙소앞에 펼쳐진 바다로 몸을 던졌다. 잠깐의 스노쿨링 후 아이가 바닷물의 소금기에 불평하면 방에 포함된 수영장에서 튜브를 탔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아이는 전용 버틀러와 함께 키즈카페로 출근했고 우리는 잠깐 뒹굴거리고는 스파를 하러 가거나 바다에 발을 담그다가 오후 두시부터 시작하는 해피아워에 맞춰서 칵테일을 마시러 갔다. 체스를 두고 카드게임을 했다. 저녁 무렵 아이가 돌아오면 한 발자국도 벗어 나기 싫은 숙소에서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금세 잠든 아이 옆에서 우리도 곯아떨어졌다. 똑같은 루틴으로 5일을 살았는데 이렇게 지루하긴 커녕 하루가 빼곡하게 느껴질 수가 있구나, 싶었다. 그만큼 행복했다는 거다. 근데 나와 남편은 이 말도 연거푸 하곤 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이 이토록 소중할 수 있는 건, 또 욕하면서 일할 곳이 있기 때문이야. 응. 맞아. 그리고 심지어 여기 있는 이 순간이 우리가 또 욕하면서 일할 유인이 되어 주기도 하지... 악순환이라고 해야할까. 선순환이라고 해야할까... 무튼 그래....
그 때 그 이글루스의 멋진 언니는 늘 쿨하고 칠하게 마무리했던 것 같은데 어째 내 글의 마무리는 묘하게 자조적이면서 씁쓸하기만 한걸까... 그래도 난 이렇게 자란 내가 나쁘지만은 않다. ENFP에서 ISTJ로 변모한 내가 사회에 잘 적응한 인간군상의 한 표본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나일수록 몰디브는 더더욱 다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