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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와 나

슬픔을 응시하며 살아가다

by 뚜샷뜨아

나는 관계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지독히도 관계지향적인 나에게 관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과 고찰을 담은 이야기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관계는 가족이다. 물론 가족 외 여러 지인들과의 관계도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와 느끼는 점 역시 다르다. 그러나 관계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할수록 몰랐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잘 안다고 생각하던 가족인데 실상 모르는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고, 생각보다 관계 유지에 무관심했던 면을 알게 되었다. 관계지향적인 성격이라고 말하면서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닌 일방통행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철저하게 나의 시선에서 쓰는 이야기가 상대방에게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도 겁이 났다. 자기 검열이 시작되고 글쓰기가 조심스러워지는 순간을 부지불식간에 마주하면서 호기롭게 시작한 연재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깊어졌다.


나의 삶은 과연 지인들과의 관계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일까?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연대로서 관계를 맺고 산다. 연대란 같은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나의 큰 생각 덩어리 일 것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생각 덩어리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면 눈빛으로 연결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가족과 지인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서도 내 삶의 가치관이 흔들릴 정도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2024년 푸른 용이 일깨워 주었다.


2024년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렸다. 우리 집 책장 한편에 무심하게 <채식주의자> 도서가 꽂혀 있었다. 햇빛을 받아 제목색이 바래져서 잘 보아야 보일 정도이다. 작가의 이름이 특이했고, 본 적 없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 책을 쓴 작가가 무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고 하니 막연하게 어깨에 소위 국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글로 된 문학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날이 온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새삼 한국인으로서 한글을 바르고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게 스스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의지도 생겨났다. 한강 작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소년이 온다> 도서를 서둘러 대출 신청했다. 시립도서관마다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는 전시가 열리는 바람에 조금만 늦었어도 도서 대출을 못할 뻔했다. 서점에서는 한강 작가의 도서 완판 소식이 들리고, 당근 마켓에서는 아주 비싼 가격으로 한강 작가의 중고 도서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어느 지인을 만나도 책과 관련된 수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상황이 낯설었지만 기분이 좋은 변화였다. 대화하기 좋은 소설은 단연 <소년이 온다>였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 배경이 된 소설이기에 소년이 보여준 처절함, 분노, 무력함, 아픔, 슬픔을 다 같이 나눌 수 있었다. 한강 작가의 '문학은 폭력의 반대편에서 인류를 연결한다'라는 수상 소감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책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많은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앎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바라는 노란색 불씨 하나가 켜지는 것 같았다.


12월 3일, 내일의 일상을 위해 일찍 자려고 준비하던 차에 SNS 단톡방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발 빠른 지인들이 퍼다 날라주는 뉴스에 어리둥절했다. 너무 졸렸기에 글을 잘못 본 줄 알았다. <소년이 온다> 소설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 내용을 복기하는 건 줄 알았다. TV를 켜니 책에서 읽었던 군복 입은 사람들이 국회로 몰려들고 있었다. 뉴스 속에서 소년이 친구를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다행히 그 누구도 피 흘리지 않았지만 나의 시야는 붉어졌다. 공포스러웠던 6시간이 지나고 겨우 안심할 수 있었지만 뒤통수가 얼얼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절절히 가슴 아팠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목도한 많은 한국인이 정치에 관심이 있건 없건 저항의 파란색 불씨가 켜지는 것 같았다. 폭력적인 저항도 아니고, 뜨거운 촛불의 저항도 아니었다. 다채로운 불빛의 성숙하고 화려한 카니발 같아 보이는 집회는 소름 끼칠 정도로 성숙하고 아름다웠기에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다.


카니발을 주도한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를 겪지 않았다. 전쟁도 겪어보지 않았다. 민주화운동도 겪지 않았다. 경험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불의에 저항한 위인들과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 덕분에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을 빠르고 명징하게 학습했을 것이다. 정치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지 않고 적어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새해를 기다렸다. 다가오는 아이들 겨울방학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가까운 해외로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찾아온 항공참사는 우리 가족이 겪었을지도 모르는 가까운 비극이었다. 화염과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가련한 삶들을 보았다. 너무 슬퍼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그저 눈물이 났다. 마침 읽고 있던 <슬픔의 위안> 책에서 작가는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 만. 히. 응시하게 되기까지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슬픔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였다. 또 사람들을 덜 외롭고 덜 두렵게 해주고 싶었고, 슬픔이란 주제에 대해 더 많이 말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우연찮게 읽고 있던 이 책의 제목처럼 무력감에서 오는 슬픔에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슬픔을 견디고 있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탄생 기쁨도, 분노를 카니발로 승화시킨 집회도, 새해가 가까워지며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던 보신각 종 앞에서도, 많은 한국인은 참사의 슬픔 앞에서 숙연한 검은색 불씨를 켰다.


같은 불씨를 느낄 때마다 연대가 이루어졌다. 나는 연대 관계 속에서 살아 나간다. 문득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일상을 무탈하게 영위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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