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not simple.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일상은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다. 관계 속에서 같은 실수, 같은 잘못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수없이 하면서 최소한 비슷한 상황은 피해 다니며 실수를 번복하는 일을 피한다. 나이를 먹은 만큼이나 다양한 관계 속에서 맺고 풀기를 경험했기에 관계 회복력과 상처가 아무는 탄력성이 좋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속은 알 수가 없고 회복력과 탄력성을 어떤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스스로 단단해졌다는 착각 속에 사는 걸까?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내가 취하는 방법은 상황을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지만 사는 모습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면 틀어져 버린 관계가 꼭 나만의 문제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거라고 위로받는 것 같다. 그래서 경험을 통해서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사람과 상황을 분류하고 일반화시켰다. "Simple is the best" 청춘기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불빛이 되어 주었던 문장과도 연결되는 모습이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어느 순간 나의 감정까지도 일반화되었나 보다. 지금까지의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은 감정이 생겨나니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일상의 매 순간을 지배하고 있는 미분류 감정은 불쑥 튀어나와 나의 시선을 어지럽히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나의 모습은 마치 터져서 너덜 해진 쓰레기 봉지 같다.
얼마 전 알고 지내던 사람과 멀어졌다. 그저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 중 하나였다. 횟수로 따지면 4년 남짓의 오래 알고 지내지 않은 편이다. 학생 시절에는 동성 친구와의 관계를 우정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나이가 들어 만난 동네 지인과는 사실 우정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아이들이 커가거나 사는 곳이 바뀌면 언제든 멀어질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어른들의 세계 같은 것이다. 동네 지인과의 관계에서는 금이 가더라도 덤덤할 수 있고,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나의 분류 속에 동네 지인은 좁혀질 수 없는 사회적인 거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유독 가슴이 먹먹해졌다.
동네에서 문화 강좌를 듣다가 지인의 지인이었던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사람에게 경계가 있어 보였기 때문에 굳이 다가가려고 애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첫 이미지와는 다르게 친절하고 상냥했고 심지어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초 1이었던 둘째 아이 하교를 기다리는 시간에 길 위에서 마주쳐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당시 나는 글쓰기에 갑자기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중이었다. 서로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그녀 역시 글쓰기를 좋아하는 데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기도 잘 쓰지 않는 사람이 글쓰기에 관심이 갑자기 생겨나긴 했으나 당연히 독서와는 멀리하고 살아왔던 터라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와 글쓰기와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눈 경험은 없었다. 그녀와 하는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글과 책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대화가 새롭고 삶이 풍요로워졌다. 삶에 대한 시선을 공유하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지지하고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내내 편안하고 충만하고 감사했다. 서로에게 진실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작년 해가 저물기 며칠 전 그녀가 나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나의 배려 없는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정색하고 따지는 말들은 가시가 되어 내 가슴속에 박혔다. 흥분하지 않은 어조의 정돈된 말투로 일련의 사건들과 감정들을 쏟아냈다. 그중에는 내가 분명 말실수를 한 부분이 있었다. 나의 의도를 해명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점을 사과했다. 그녀를 아프게 해서 미안했고 후회가 되었다. 곧이어 나의 실수를, 그녀의 감정변화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되었다. 그녀의 끝나지 않은 서사에는 오해의 오해가 거듭되어 우리의 만남에 어떤 의도를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왔다.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자책하는 부분 외에 그녀가 하는 대부분의 말 가시의 끝은 내가 아닌 그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로 인해 감정이 상하게 된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서로가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녀가 기분이 나쁘고 힘들었다면 오해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서로에게 진실하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그녀에게 어떻게 가닿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도 그녀의 말과 행동을 신뢰할 수 없다. 신뢰하는 것이 두려워서 결국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말하지 않을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글로 적어두고 싶다. 만남은 우연이 만들어내고 헤어짐은 필연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사람과의 만남이다. 사람 간의 일이 내 맘 같지 않아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신비롭고 소중한 순간들이다. 그 소중한 순간들이 모인 관계를 결국은 내가 끊어내야 끊기는 것이 헤어짐이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심지어 모든 인간관계는 '이별'을 전제로 성립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이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한 점 후회도 없게.
나는 집에서 일반적으로 10L짜리 종량제 봉지를 구입하여 담을 수 있을 만큼, 들기에 무겁지 않을 만큼의 쓰레기가 차면 바로 처리한다. 그런데 아이들의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묵혀 있던 큰 쓰레기를 정리하는 참에 20L짜리 종량제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남는 공간에 욕심이 생겨서 몇 날 며칠 동안 나오는 작은 쓰레기들을 넣어 꾹꾹 눌러 담고 봉지를 묶었다. 재활용할 수 없는 나무토막 따위의 쓰레기들이 봉지 묶음 사이로 삐죽 빠져나왔다. 남편이 봉지 위로 빠져나오는 쓰레기를 다시 한번 발로 누르는 순간 봉지가 터져버렸다. 나는 눈물이 터져버렸다.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남편이 당황하며 왜 우느냐고 물었고 나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찢어진 쓰레기 봉지가 문득 내 모습 같아서, 다 내 잘못 같아.”
남편과 나는 분류되지 않는 쓰레기가 담긴 터진 봉지를 스카치테이프로 다시 단단히 봉해 쓰레기장에 버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봉지에 꾹꾹 눌러 담았다. 나를 상처 내고 재활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미련스럽게 꽉꽉 채웠다가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서건, 터져버릴 거였다.
나는 그녀와 최선의 이별을 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복합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느낀다. 감정이 정리되면 이별이 끝이 날까? 나의 복잡한 감정들도 굳이 정의하려 하지 않은 채 버리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