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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효진 Sep 19. 2023

우리에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

우당탕탕 커뮤니티 멤버십 이름 짓기 

뮤지션 시와의 '새 이름을 갖고 싶어'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갖고 싶어 새로운 이름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왔다. 나도 새 이름을 갖고 싶은데. 다른 이름으로 불려 보고 싶은데. 새 이름으로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데.


본명이 아닌 이름으로 불려본 적은 거의 없다. 글을 쓰거나 사회적으로 활동할 때 사용하는 닉네임도 따로 짓지 않았다. 새 이름을 갖고 싶지만, 새 이름을 스스로 만들지는 않았던 거다. 역시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나.... 그렇지만 새로운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특정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즉 커뮤니티에 속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BTS의 팬클럽인 아미(ARMY)처럼. 


나 또한 청소년 때는 한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에 소속되어 새 이름을 가진 적이 있으나 그 이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고('월아지기'라는 이름을 원한 사람이 있긴 있었을까? 어느 아이돌의 팬클럽 이름이었는지는 비밀에 부쳐두기로 한다) 당연히 거기에 소속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사실, 같은 커뮤니티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는 것 자체가 별로라고 여겨왔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인 인간입니다… 굳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니나 사이먼의 <연관성의 예술>이라는 책에서는 커뮤니티를 이렇게 정의한다. "커뮤니티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수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실체적인 인간 존재들이다." 정확히 내 생각과 같다. 그렇지만 니나 사이먼은 이렇게도 덧붙인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커뮤니티의 모든 사람과 개별적으로 이야기하여 그들 각각의 요구나 필요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꿈과 욕망의 신체들은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파악한다. 그것이 바로 커뮤니티다.


그러니까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다르지만 그것을 일일이 다르게 파악하는 일은 어렵고, 때문에 그들이 공유하는 특성을 이해하여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마 그 '특성'이란, 커뮤니티에 속해있는 모든 이들이 납득할 수 있거나 원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뉴스트롱허니즈?


커뮤니티에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는 고집이 달라진 건 몇 달 전쯤이었다. 뉴그라운드를 안전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라고 느끼거나,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받는다는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이 사람들과 하나로 묶여있다는 감각... 꽤 괜찮잖아? 그렇자면 이제는 새로운 이름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새로운 정체성을 담아줄, 내가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이름 말이다.


우리를 표현할 이름을 커뮤니티 운영자인 나 혼자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멤버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 한 멤버가 챗GPT에게 뉴그라운드 멤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챗GPT는 다음과 같은 이름들을 제안했다. 


- 참새파랑, 미소녀미림, 꿈꾸는해바라기(여성들의 커뮤니티라고 했더니 챗GPT 마음대로 '포근하고 친근한' 느낌을 담은 계열)

- 브레이브워리어, 라이징파워, 드림캐처('포근하고 친근한' 느낌을 제거한 계열)

- 뉴파워레이디스, 뉴스타트워먼, 뉴액티브퀸즈, 뉴스트롱허니즈(운동장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담고, 제일 앞에 '뉴'를 붙인 계열)


챗GPT의 실제 제안


그 와중에 의외로 '뉴스트롱허니즈'에 호감을 보이는 멤버들이 있었다. "뉴스트롱허니즈 좀 귀엽지 않나요?" 


인정한다. 솔직히 귀여운 이름이었다. '스트롱'과 '허니즈'라는 대비되는 이미지의 단어가 붙어 있는 것도 좋았고, 발음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느낌도 좋았다. 아직 정확하게 어떤 상이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귀여운 캐릭터로 구현될 가능성도 보였다. 이대로 IP 사업에 진출해야 하나? 뉴그라운드의 비즈니스 모델은 상상하지도 않았던 IP 사업이 되는 건가? 뉴스트롱허니즈를 줄여서 '뉴롱스'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뉴스트롱허니즈…. 발음할수록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챗GPT에게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는 법. 뉴스트롱허니즈를 이기기 위해 '뉴그라운드 멤버십 네이밍 워크숍'을 통해 멤버들과 직접 이름을 지어보기로 결심했다. "여러분, 챗GPT가 '뉴스트롱허니즈'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제안했어요. 꼭 네이밍 워크숍에 함께 하셔서 챗GPT를 이겨 주세요." 멤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래, 이제 같이 아이디어를 짜내서 더 멋진 새로운 이름을 짓기만 하면 된다. 근사한 새 이름을 갖고 싶은 많은 멤버들이 워크숍에 몰려오겠지.... 뉴스트롱허니즈의 시대는 곧 끝난다....


극소수 정예 전략기획팀의 네이밍 워크숍


워크숍 당일, 줌 화면에 비친 멤버들의 표정은 조금 어리둥절해 보였다. 머쓱해 보였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나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네이밍 워크숍을 신청한 인원은 총 4명. 이 숫자는 심지어 나를 포함한 인원이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워크숍 계획을 알렸을 때는 관심 있는 멤버분들이 많은 것 같았는데.... 수많은 멤버들과 화기애애하게 진행해 보려던 워크숍은 갑자기 극소수 정예 인원의 전략기획 회의가 됐다. 농담처럼 '극소수 정예'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실제로 네이밍 워크숍에 참여한 멤버들은 '전략기획팀'이라는 포지션에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브랜딩 전문가 K. 퍼스널브랜딩 관련 책을 출간했고, 스스로도 '칭찬'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작은 커뮤니티를 운영해 본 K는 뉴그라운드 멤버가 되기 전부터 '퇴근길 일기'라는 채널을 슬랙에 열어볼 것을 제안한 사람이다. '특정 시간대를 점유하는 브랜드가 소비자들과 관계 맺기에 더욱 유리하다'는 그의 설명에 바로 설득되어 뉴그라운드 슬랙에 '퇴근길 일기' 채널을 개설했었다. 


그리고 콘텐츠 전문가 D. 한 콘텐츠 플랫폼에서 리더급으로 일했고, 지금은 또 다른 조직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D는 뉴그라운드의 다양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멤버다. 늘 웃는 얼굴의 D가 함께하면 모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관점의 교육 전문가 J. 더 섬세하게, 탁월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언제나 고민하는 J는 조용해 보이지만 은근히 웃긴 스타일로, 그를 한 번만 직접 만나봐도 금세 마음을 열게 된다. 


자, 멤버들은 준비됐고 나만 잘하면 된다. 이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돼.... 제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여느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돌아가며 말을 거는 방식으로 워크숍을 진행하려고 했다. D가 말했다. "오늘은 아이데이션을 하는 자리니까, 돌아가면서 차례대로 말하는 것보다는 모두 마이크를 켜고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맞네,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자리인데 말하는 방식은 너무 경직돼 있었구나. D의 제안 이후 우리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순서 없이 나누기로 했다.


"그럼 이제 이 패들릿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정리해 볼까요?" 뉴그라운드를 떠올리면 드는 느낌, 뉴그라운드 멤버들의 이미지, '뉴그라운드'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떠오르는 표현 등 아이데이션을 위해 미리 세팅해 둔 패들릿을 화면 공유로 들이밀었다. 아무리 아이데이션이라도 어느 정도의 틀은 필요하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틀을 잘 만드는 편이니까. 이제 이 패들릿을 가지고 멤버들과 아이디어를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완벽한 계획이지....


그때 J가 말했다. "그런데, 혹시 왜 멤버십 네임을 짓기로 한 건지 고민의 과정을 먼저 공유해 주실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이름을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연히 모든 멤버들이 그 과정을 공유하고 있을 거라 오해했던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주제에 대한 모두의 이해도를 가급적 맞추는 것, 상대방이 아는 것과 내가 아는 것이 당연히 비슷할 거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임을 수도 없이 배웠음에도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잠시 패들릿을 밀쳐두고, 왜 멤버십 네이밍을 하겠다고 결정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모두 개별적인 사람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것부터, 그렇지만 지난 시즌 뉴그라운드 커뮤니티를 경험하면서 '이 사람들과 새로운 정체성의 이름을 만들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 챗GPT가 '뉴스트롱허니즈'를 비롯해 헛웃음 나오는 이름들을 많이 제안해 줬다는 것, 그렇지만 이왕이면 멤버들과 힘을 합쳐 이름을 짓고 싶어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듣는 동안 J의 얼굴이 차츰 밝아졌다. 나머지 두 멤버들도 네이밍 워크숍이 왜 열렸는지 한 번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어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멤버십 이름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이후 워크숍은 더욱 순조롭게 진행됐다. 뉴그라운드는 안전한 울타리 같고, 느슨하지만 단단한 커뮤니티고, 멤버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는 사람들이자 믿을 만한 동료고.... 패들릿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뉴그라운드와 뉴그라운드의 멤버들에 대해 어느 정도 비슷하게 좋은 이미지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기도 했다. 


네이밍 워크숍에서 사용한 패들릿 


그런데, 그래서 멤버십 이름은 뭘로? 이름을 지어야 하는 타이밍이 되자 모두의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역시 뉴스트롱허니즈일까요? 이게 제일 귀엽긴 한데...." 망설이는 내 말에 D가 덧붙였다. "'스트롱'과 '허니즈'라는 상반된 느낌의 단어가 붙어서 좋은 것 같아요. 뉴스트롱허니즈 괜찮지 않을까요?" 


인간이 챗GPT를 이길 수는 없는 걸까, 이쯤에서 워크숍을 슬슬 마무리해야 하나 싶을 때쯤 K가 질문을 던졌다. "멤버십 이름을 짓는 데 제일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면 어때요? 명예를 부여하는 게 중요할 수도 있고, 멤버들이 불리고 싶은 이름인 게 중요할 수도 있고, 어감이 좋은 게 중요할 수도 있고, 그 기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 커뮤니티 바깥에서 이 이름이 어떻게 보이는가, 얼마나 명예롭게 보이는가를 중심에 두고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거든요." 


'멤버십 이름을 짓는다'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애초에 '어떤 이름이 좋은 이름인가?'에 대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네 명은 모두 머릿속으로 다른 기준을 두고 아이디어를 내고 있었다. 나의 첫 번째 기준은 '멤버들이 갖고 싶은 이름인가?'였다. K의 말을 듣고, 기준에 대한 내 생각을 설명했다. 


"저는 멤버들이 가지고 싶은 이름, 소속되고 싶은 이름, 그것으로 나를 소개해도 좋은 이름인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결국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될 사람들은 멤버들이니까요. 오늘 이 기준을 최우선에 두고 이름을 지어보면 좋겠어요."


기준이 명확해지자 '뉴스트롱허니즈'를 선택할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뉴스트롱허니즈라고 불리고 싶으신가요? 뉴그라운드 바깥에서 '안녕하세요, 뉴스트롱허니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싶으신가요?" 내 질문에 K와 D, J는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D는 단호하게 팔로 엑스자를 그리기도 했다. 


벤치워머스와 뉴그라운드의 상관관계


문득, '벤치워머스(benchwarmers)'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어딘가 귀엽다고 느껴왔던 터였다.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를 지키는 선수들을 '벤치를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다니. 여기서 '워머스'만 떼어서 멤버십 이름으로 사용한다면 '뉴그라운드'가 이미 가지고 있는 운동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터였다. 진짜 '벤치워머스'처럼 (지금은 잠깐 쉬고 있지만) 언제든 경기에 나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뉴그라운드를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워머스' 괜찮은 것 같아요." 

"발음 때문에 '우먼스'도 연결되어 떠오르고요." 

"뜻도 어감도 귀엽고, 마음에 들어요." 


다행히 K와 D, J도 모두 '워머스'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워크숍을 시작한 지 1시간 10분 만에 '워머스(warmers)'라는 멤버십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한때는 아이디어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아이디어가 발전된다는 사실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때문에 근사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함께 한 사람들에게 고마워하기보다,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린 나 자신에게 감탄했다. 뉴그라운드 멤버십 이름을 짓는 동안 그게 아니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아이디어는 온전히 한 사람에게서 탄생할 수 없다. 챗GPT에게 멤버십 이름을 물어준 R, 워크숍에 참여한 K와 D와 J, 그리고 이름에 대한 의견을 준 뉴그라운드의 멤버들이 없었더라면 '워머스'라는 이름도 나올 수 없었다. '워머스'는 우리 모두의 아이디어와 리액션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졌다.


안녕하세요, 뉴그라운드의 워머스입니다.
언제든 나가서 뛸 준비가 된 사람들이자,
커뮤니티를, 내가 일하는 조직을,
속해 있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새 이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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