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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효진 Sep 12. 2023

여자들을 위한 우정의 사회학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에서 우정이 가능할까?

[지난 이야기]

'멤버 중심의 커뮤니티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던 뉴그라운드 우연히 방문한 카페에서 '재능 바꾸기' 코너를 발견하고 뉴그라운드 슬랙에 같은 이름의 채널을 개설한다. 멤버들은 해당 채널에서 각자의 재능을 자랑하고, 그 과정에서 팬케이크와 계란말이 만들기 모임이 탄생한다. 모임을 위해 각자 연습을 거듭한 뉴그라운드 운영자 H와 멤버 R. 드디어 모임 당일, 다른 멤버들이 보는 앞에서 야심 차게 팬케이크와 계란말이를 굽기 시작하지만 인덕션이라는 예상치 못한 난관 앞에서 당황하고야 마는데...


지난 이야기 전문 읽기


오래전 방영됐던 JTBC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프로 셰프들이 출연자의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를 활용해 자기 장기를 살린 메뉴를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내는 콘셉트였다. 빈약한 재료로 어떻게든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셰프들의 기량이 놀라웠다. 


사실, 한동안 유행했던 요리 프로그램은 다 좋아했던 것 같다. Olive <마스터셰프 코리아>라거나 <한식대첩> 같은 것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셰프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함께 안타까워하거나, 때로는 혼자 약간 비웃기도 했다.


다른 멤버들이 보는 앞에서 팬케이크를 굽는 동안 그때의 나를 반성했다. 그냥 요리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긴장되고 피곤한데, 잘 만들기까지 해야 한다면, 게다가 시간제한까지 있다면, 또 심사까지 받아야 한다면... 왜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그 상황에 직접 처해보지 않으면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걸까. 급격히 밀려드는 피로감을 느끼며, '차라리 팬케이크를 집에서 몽땅 구워올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구워야 하는 21장의 팬케이크가 남았기 때문이다. 


과연 팬케이크와 계란말이의 운명은?


"저기, 아직 팬케이크랑 계란말이가 멀었으니 바나나라도 드시고 계세요." 당황하지 않은 척 멤버들에게 바나나를 권했으나 그들이 원하는 건 팬케이크와 계란말이, 오로지 그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이제 예쁜 팬케이크는 바라지도 않고 저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상태의 팬케이크를 빠르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옆을 보니 R은 들러붙은 프라이팬 바닥에 들러붙은 계란을 이렇게 저렇게 잘 그러모아 오믈렛 비슷한 계란말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저런 유연함을 발휘하다니? 어쩌면 R은 타고난 요리사일지도... 비록 인덕션은 잘 못쓰지만....


모임을 연 호스트로서 팬케이크도 굽고, 이야기도 하며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사명감이 내겐 있었으나 그럴 여유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지금 분위기를 띄우는 방법은 팬케이크를 부지런히 잘 구워내는 것뿐이다. 입을 닫고 열심히 팬케이크를 구워 한 장 한 장 완성될 때마다 멤버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큰 접시 위에 얹어두었다. 팬케이크가 한 장 한 장 사라질 때마다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저게 끊기지 않도록, 그래서 입맛만 다시는 사람이 없도록 계속 구워내야 하는데! 다행히 R의 계란말이가 팬케이크와 팬케이크 사이를 잘 채워주었다. 멤버들은 폭신폭신한 계란말이를 가져다가 식빵 사이에 끼워 계란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팬케이크를 15장쯤 구웠을 때, 비로소 인덕션의 온도가 적당해지고 프라이팬도 알맞게 닳아 의도했던 캐러멜색 표면의 팬케이크가 구워지기 시작했다. 멤버들에게 노릇노릇한 팬케이크를 보여줄 수 있어서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완성된 팬케이크와 계란샌드위치 플레이트. 더 잘 구울 수 있었는데... 


기다림에 지쳐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도 멤버들은 그저 기뻐했다. 이렇게 예쁜 팬케이크는 처음 봐요! 브런치 먹으러 온 것 같아요! 많은 음식이 그렇듯 만드는 데는 1시간 30분 정도, 먹는 데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우리는 일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팬케이크와 계란말이와 계란 샌드위치를 맛있게 나눠 먹고 헤어졌다.


모임이 끝나자 긴장이 풀어져 급 피곤해졌지만, 이상하게 행복했다. 일 이야기를 나누자고 모인 커뮤니티에서 이렇게 뭔가를 먹기만 하고 헤어져도 되나?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너무 재미있네? 그날 함께한 멤버들의 마음도 비슷했는지, SNS에 모임 후기와 사진이 여기저기 올라왔다. 우리 사이에 뭔가 다른 모양의 친밀감이 생긴 것 같았다. 


어쩌면 중요한 건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커뮤니티 운영자로서 자주 갈팡질팡한다. 일에서 겪는 어려움을 나눌 동료나 친구가 부족하니, 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중요하다. 그런데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일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제안하는 게 과연 맞을까? 일 외에 시간에는 일을 깨끗이 잊고 지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일과 건강하게 관계 맺자고 멤버들에게 말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더 일에 매여있게 부추기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프로그램이나 모임을 진행하는 데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팬케이크와 계란말이 모임을 하고 나서,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쩌면 커뮤니티의 전부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배웠다. 그 '재미'에는 다양한 의미와 방식이 있을 테고 말이다.


뉴그라운드의 그다음 시즌이 되어, 나는 다시 샌드위치 조립 모임을 열었다. 멤버들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아 모임이 취소되기 직전, 멤버 H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가 당근 라페를 만들 줄 아는데, 샌드위치와 라페를 함께 만들어 먹으면 어떨까요?" 모임 공지에 당근 라페 만들기가 더해지자 놀랍게도 신청이 쇄도했다. 또 공유 주방에 모인 우리는 준비한 재료로 각자의 스타일대로 삐뚤빼뚤 샌드위치를 만들고, H의 리드에 따라 당근 라페를 만들었다. 샌드위치도 당근 라페도 아주 맛있었다. 이번에도 일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든든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우정을 연습한다


나는 여자들의 우정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친구가 많고 우정을 잘 쌓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 반대라서다. 친구는 많지 않고, 누군가와 천천히 가까워지는 방법을 잘 모른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는 단번에 깊은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면서 조급하게 내 비밀과 속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내 기대만큼 나에게 가까워지지 않으면 혼자 실망한다. 그런 사람 외의 이들과는 너무나 먼 거리를 둔다. 모 아니면 도밖에 모르는 인간관계. 커뮤니티는 그 중간의 수많은 지점에서도 우정이 탄생할 수 있음을 내게 가르쳐준다. 




케일린 셰이퍼의 책 <여자들을 위한 우정의 사회학>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여성들의 우정을 증명하기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여성들이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더라도
남자들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교활해서 남자들처럼
순수하고 이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부분을 읽으며 가끔 받았던 '여성 커뮤니티? 거기서 여자들끼리 모여서 뭐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지금 다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 안에서 새로운 우정을 연습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반면에, 여기서 우정이 싹트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배운다. 우정은 단지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만큼 우정도 아주 희소하기 때문이다. 언뜻 사랑과 달리 우정은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시간과 마음과 힘을 쏟지 않으면 당연히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쏟아도 얻어지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우정은 쉽지 않지만 


한 친구가 얼마 전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어떤 리더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는 멤버들을 하나하나 잘 챙기기로 유명하다'고 평했다. 팀원이 처음 합류하면, 초기 1년간은 정기적으로 그와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그 리더가 생각하는, 팀원과 팀 간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그 정도인 거지."


이 말을 듣는데 문득 깨닫게 되는 게 있었다. 그동안 나는 이 커뮤니티에 오는 멤버들이 동료를 발견하고, 서로와 친구가 되기를 바랐다. 서로가 서로의 일상에 충분히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했다. 그 바람 때문에 늘 마음이 조급했다.


물론 한두 번을 만나도 그런 관계가 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건 매우 드물고 대부분은 잠깐 어디선가 스쳐 지나간 사이로 남는다. 한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다는 사실만으로 멤버들 간에 저절로 우정이 싹트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감이 있는 동료이자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아마 아주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회사나 학교에서처럼 늘 만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마찬가지로, 뉴그라운드에 오는 멤버들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고충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싶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6주로는 어림도 없고, 3개월이 걸릴 수도, 6개월이 걸릴 수도, 1년이 걸릴 수도 있다. 게다가 시간만 흐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진 마음과 힘 같은 자원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우정을 발명하는 데 성공했을 때, 여기서 만난 우리의 관계는 어떤 모양이 될지 궁금해진다. 


"우정을 되찾으면서, 내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리고 다른 여성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 우리 친구들은 차선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그들은 우리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용기를 주는 멘토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싸워주고 우리 곁에 남아줄 동지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잘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는 보호자들이다." 

_케일린 셰이퍼 <여자들을 위한 우정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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