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이야기 나누는 커뮤니티에서 요리 모임이라니
모임을 위해 식재료를 구매한 건 처음이었다.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팬케이크 믹스 3개와 계란 30구, 식빵 4 봉지, 메이플 시럽 1개, 산딸기 1개, 바나나 2 손, 와사비 마요네즈 1개, 후레시 마요네즈 1개, 밀크&얼그레이 스프레드 1개, 백포도 주스 1개, 쇼군 오렌지 주스 1개를 담았다. 과일을 좀 더 사야 하는 건 아닐지 잠시 고민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커뮤니티 만드는 일을 햇수로 5년째 하고 있지만, 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은 '구성원들을 어떻게 커뮤니티의 진짜 주인공으로 만들 것인가?'이다. 모두와 함께 만들어 가는 게 커뮤니티일 텐데, 뉴그라운드처럼 사업자인 운영자가 따로 있고 그가 먼저 시작한 커뮤니티일 경우 구성원들을 커뮤니티의 중심에 두는 게 쉽지는 않다. 멤버들이 일정한 비용을 내고 커뮤니티에 가입했으니, 그들에게 아무것도 부탁해서는 안 되고 그들을 귀찮게 해서도 안 되며 커뮤니티에 필요한 모든 일을 운영자가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꽤 오래 가지고 있었다. 같이 만드는 커뮤니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어느 날, 어떤 행사에 참여했다가 힌트를 얻었다. 보틀라운지 벽에 붙어있던 '재능바꾸'였다.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자신의 재능을 써둔 코너로, '구멍 난 옷에 자수 넣기'라거나 '강아지 그려주기'라거나 '머리 예쁘게 묶어주기'라거나 '나무와 벌레 이름 알려주기'라거나 하는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재능들이 쓰여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가 속삭였다. "'재능바꾸' 너무 좋은 아이디어인데? 뉴그라운드에도 저런 코너를 만들어 보면 어때?" 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멤버들이 모여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슬랙)에 채널만 하나 새로 만들면 된다. 각자의 재능을 자랑하다 보면 그걸 시작점으로 새로운 모임이나 만남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슬랙에 '재능 바꾸기' 채널이 열리고, 멤버들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고, 나 또한 팬케이크 잘 굽는 재능을 자랑하고, 그걸로 모임을 열고, 계란말이 굽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멤버 R이 모임에 합류하고,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의 신청을 받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슬랙에 모임 안내 글을 올리고 2일 후, 목표했던 인원이 무사히 모두 모집됐다. 팬케이크를 너무너무 좋아한다는 멤버 K의 어린이까지 총 11명.
뒤늦게 '일 이야기를 나누자고 만든 커뮤니티에서 일과 전혀 관계없는 모임을 해도 될까?'라는 걱정이 살짝 밀려왔으나, 그건 일단 해 보고 나중에 고민해도 될 부분이었다. 더 큰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늘 혼자 먹을 정도의 팬케이크만을 구워봤던 내가 11명이 넉넉하게 먹을 정도의 팬케이크(최소 22장)를 시간 안에 어떻게 구워낼 것인가. 근데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하기로 했는데 해야지.
이쯤에서 팬케이크 잘 굽기의 팁을 먼저 공개하자면, 핵심은 '약불'과 '기다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절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지 말 것. 내가 팬케이크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표면이 먹음직한 캐러멜색을 띠는가'인데, 기름을 두르지 않은 약불의 가스레인지에서 팬케이크 반죽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기다리다 뒤집으면 틀림없이 만족스러운 팬케이크가 만들어진다. 나는 이걸 '영겁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라고 설명하고는 한다. 그래서 22장의 팬케이크를 구우려면 1시간을 훌쩍 넘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하기로 했으니 하는 거다.
'팬케이크와 계란말이 시연 모임'을 하기로 한 날, 미리 빌려놓은 공유 주방 문 앞에는 주문한 재료들이 무사히 도착해 있었다. 잠시 후 계란말이를 만들기로 한 R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도착했다. R이 가져온 앞치마를 나와 R 모두 비장하게 둘렀다.
R은 대학 축제 때 살면서 가장 많은 양의 계란말이를 구워본 덕에 이 재능을 갖게 됐다는데, 그 이후로는 계란말이를 자주 해 먹지 않아 이 모임을 위해 집에서 따로 연습도 해봤다고 했다. R님, 실은 저도요.... 모임 전날 연습을 통해 내 팬케이크 굽기 실력이 조금도 퇴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내가 먹기 위해 팬케이크를 굽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구워주는 것은 다른 문제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어, 근데 여기 인덕션이네요?" R의 말에 조리대를 확인했더니 거기에는 가스레인지가 아닌 인덕션이 설치돼 있었다. "인덕션에서 팬케이크를 구워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죠." 잠깐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인덕션이라면 뜨거움의 정도를 조절하기가 더 편할 테니 오히려 가스레인지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아야만 한다.
곧 멤버들이 모두 도착했다. K와 함께 한 어린이는 팬케이크 레시피를 배워가겠다고 야무지게 펜과 수첩까지 챙겨 왔다. 저기.... 거기 쓸 레시피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멤버들은 물론 어린이에게도 실망만 안기고 모임이 끝날까 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니야, 잘할 수 있어. 기름 없이, 약불, 영겁의 시간. 이것만 기억하자. 하던 대로만 하자. 심호흡을 했다.
R과 나는 인덕션을 켜고 각자의 프라이팬을 얹었다. 나는 우유와 팬케이크 가루, 계란을 섞어 점성이 적당한지 확인하고 프라이팬이 충분히 달궈졌다고 판단됐을 때 반죽을 한 국자 떠서 프라이팬에 올렸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이제 팬케이크 가장자리에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며 부풀어 오를 때쯤 뒤집으면 된다. 옆에서 R도 풀어둔 계란물을 프라이팬에 올려 익히기 시작했다.
"자, 이제 팬케이크를 뒤집어 볼게요. 이렇게 딱 뒤집으면...."
이 순간을 위해 이 모임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팬케이크를 뒤집으면, 캐러멜색으로 노릇노릇해진 표면이 드러나는 순간. 모두가 탄성을 내뱉을 그 순간. 다들 제 프라이팬을 주목해 주세요!
조금도 노릇노릇해지지 않은, 허여멀건한 반죽색 그대로인 팬케이크 표면이 드러났다. 인덕션의 약불은 약해도 너무 약했던 것이다. 망했다. 어떡하지? 진땀이 났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21장의 팬케이크를 더 구워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팬케이크를 보고 있던 멤버들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모습이었다. 정확하게는, 이게 내가 의도한 대로 구워진 건지 아닌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 멤버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되는 게 맞나요? 제가 집에서 구울 때 딱 이렇게 되는 것 같은데..." 그때 옆에서 R이 계란말이를 뒤집기 시작했다. 충분히 달궈지지 않은 프라이팬 표면에 계란이 들러붙고 있었다. 계란말이가 아니라 스크램블이었다.
- R님, 저 팬케이크 망한 것 같아요. 인덕션을 한 번도 안 써봐서 그런가 봐요. R님도 그렇죠?
- 아니요, 저는 집에서 인덕션 쓰는데요....
시간은 계속 흐르고, 팬케이크 반죽과 계란은 아직 많이 남았고, 프라이팬은 여전히 달궈지지 않았다. 멤버들이 하나 둘 배고픔을 호소했다. 모두가 가장 배고플 시간, 낮 12시였다.
(다음 회차로 내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