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은 그만
나는 커뮤니티계의 칸트다. 산책하는 시간이 언제나 너무 정확했다는 칸트처럼, 프로그램이나 모임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시간을 늘 칼같이 지킨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한때는 모든 참가자가 출석할 때까지 기다리며 약속한 시작 시간에서 5분, 10분 정도를 지연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참가자로부터 '정시에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프로그램을 늦게 시작하는 건 불합리한 방식인 것 같다'라는 항의를 받았다. 너무 맞는 말이라 속이 쓰렸다. 그 뒤로는 시작 시간도, 마무리 시간도 반드시 약속한 대로 지키려고 한다. 그런 습관을 아는 커뮤니티 멤버들은 내가 언제나처럼 시간을 정확히 지키면 자동으로 웃는다.
게다가 나는 내향형 인간에, 많은 인원이 모인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소위 말하는 '마'가 뜨는 것도 잘 못 견딘다. 그래서 프로그램이든 워크숍이든 모임이든, 구성과 타임라인을 꽉 짜놓는다. 가끔 헐렁하게 느껴지는 모임을 진행할 때도 있지만 실은 그조차도 미리 의도한 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프로그램이나 모임을 통해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나를 'J'형 인간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건 반복된 직업적 훈련의 결과인데 말이다. 하지만 한 발짝만 나와 가까워져도 그런 오해는 금세 풀린다. "아, 효진 님 P셨군요...." 네.... 송구스럽게도....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때도 즉흥적이다. 이것저것 따져보는 것 같지만, 결국 할지 말지 한 끗을 결정하는 건 그 순간의 마음이다. 어쩌면 용기라고 해야 할까? 특별히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하는 편을 선택한다.
회사 그만둘까? -> 그러지 뭐.
친구들이랑 새로운 걸 만들어볼까? -> 못 할 이유가 있어?
내 사업을 해볼까? -> 어딘가에 출퇴근하기도 싫은데, 그럴까?
이런 식으로 벌인 일이 평생 몇만 개는 될 것 같고 그래서 후회도 자주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실수를 반복하면서 즉흥적으로 벌인 일을 수습하는 힘이라도 길러졌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최근 한 친구는 내게 '너는 일단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편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직관에 따르되, 그 직관이 옳음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를 뒤늦게라도 만들어낸다는 친구 나름의 칭찬이었는데 좋게 말하면 사후 해석과 의미 부여를 잘하는 것일 테고, 다르게 말하면 자기 합리화에 능하다는 뜻일 테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긴 했지만 결국 혼자서 커뮤니티 만드는 일을 계속하기로 선택한 것도 약간은 즉흥적이었다. 지금 그만둬야 할 이유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 그럼 계속하지 뭐! 둘이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되고, 상의할 파트너도 사라지니 일에 대한 고민은 매일 커졌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왜 내 기대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그럴 때는 무언가 분명 잘못됐으며 그걸 바꿔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흐른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뉴그라운드를 만들고 있는데,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뉴그라운드를 알지 못하는 걸까? 뭐가 잘못된 거지? 역시... 리브랜딩이 답인가?
마치 사업이 잘 안 풀릴 때 정확한 이유를 찾기보다 엉뚱하게 '우리 디자인 좀 바꿔볼까?' 하는 사장님처럼 뉴그라운드라는 커뮤니티의 브랜딩을 바꿔봐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고도 다시 만들고, 키컬러도 다시 정하고, 거기에 맞춰 홈페이지도 좀 더 정비하면 모든 게 다 잘될 것만 같은 예감. 마법의 디자이너와 마법의 디자인이 나와 뉴그라운드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만 있다고 믿고 싶은 간절함.
디자인스튜디오 [오늘의풍경]에서 브랜딩 컨설팅을 시작한다기에 냅다 신청했다. 대면 컨설팅 전 사전 문진표가 메일로 왔다. 아, 그냥 말로만 하면 되는 게 아니구나. 질문에 따라 그동안 뉴그라운드를 어떻게 운영해 왔는지, 무엇을 바라고 리브랜딩을 하려고 하는지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프로그램 기반에서 멤버십 기반으로, 그러다 수익성이 낮은 것 같아서 다시 프로그램 기반으로, 그러다 또다시 멤버십 기반으로 운영 방식을 변경했습니다.
- 아직 뉴그라운드를 모르는 더 많은 여성들에게 가닿고 싶어서 리브랜딩을 하려고 합니다.
답변을 쓰고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렇게 자주 방식을 바꾸면서 운영해 놓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니, 너무 욕심만 많은 사장님 심보 아닌지. 내 나름대로는 같은 맥락으로 일관성 있게 뉴그라운드를 운영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을 기록해 보니 전혀 아니었다. 규모도 작고, 마케팅 여력도 없는 브랜드가 일관성 있는 콘셉트를 유지했어도 고객이 차곡차곡 늘어날까 말까인데, 밖에서 보면 그게 그 브랜드인지 모를 정도로 자꾸 변화를 만들어왔구나. 생존 전략이라고 믿으며 선택했던 것들이 오히려 브랜드의 지속성을 해치고 있었던 거다.
나는 나의 다양한 면을 최대한 많이 드러내고 싶은 사람이다. 누군가 너는 이런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면, 나는 저런 면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기를 쓴다. 예컨대 '너는 일에 관심이 많지'라는 말을 들으면 '아닌데? 나는 여가도 잘 즐기는데?' 하면서 잘 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반대로 '넌 참 잘 쉬는구나' 하면 반대로 '아니거든? 난 일도 열심히 잘하거든?' 하면서 내가 얼마나 유능하고 성실한지 증명하고 싶어 한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구나 다양한 면면을 가지고 있고, 어쩌면 브랜드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이든 브랜드든 그걸 모두에게 알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사전문진표를 작성하며 1차 자기반성을 하고, 대면 컨설팅을 받기 위해 [오늘의풍경] 두 분을 만났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뉴그라운드 인스타그램 피드를 큰 화면으로 보며 피드백을 받았다. 카드뉴스 제작의 기동력을 위해 디자이너가 만들어 준 아름다운 템플릿을 포기하고, 'CANVA'라는 앱으로 혼자 이렇게 저렇게 카드뉴스를 만들고 있던 참이었다. 앱에서 적당한 템플릿을 고르고, 뉴그라운드 키컬러만 입히면 되니까, 세련되거나 예쁘진 않지만 나름대로 깔끔하고 일관성은 있지 않나... 생각할 때쯤 [오늘의풍경] 디자이너가 말했다.
그냥 커뮤니티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 수 있어요. 이렇게 계속 쓰셔도 돼요. 하지만 비즈니스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에디터가 덧붙였다.
뉴그라운드라는 커뮤니티는 퇴근 후 조도가 낮은 곳에서 편안하게 모이는 느낌인데, 지금 디자인은 조금 경직된 것 같아요.
나는 2차 자기반성에 빠졌다. 왜냐하면 그 '비즈니스 아님'과 '비즈니스이고 싶음' 사이에서 무엇도 아닌 것 같은 애매함은 지금 내가 뉴그라운드에 느끼는 고민, 더불어 뉴그라운드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뉴그라운드는 요약하자면 커뮤니티 비즈니스다. 우리가 일하는 시간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들고, 일에 과몰입하기보다 일이 관여된 삶 전반을 잘 가꾸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 말한다. 이런 메시지를 비즈니스로 풀기란 쉽지 않다. 잘 때도 돈을 벌어야(=자동화가 돼야)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그놈의 BM)이라던데, 커뮤니티는 모든 곳에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하므로 내가 잘 때는 돈도 잔다. (그렇다고 내가 깨어서 움직일 때 돈도 움직이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더 자세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나는 '잘 때 돈 번다'는 표현을 싫어한다. 내가 잘 때도 누군가는 일을 해야 결과물이든 수익이든 발생하는 거니까. 돈이 벌릴 때 '나만'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논리는 지극히 자본가적인 마인드로서.... 아무튼 커뮤니티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나, 그저 '세상에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은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막연하고 애매한 마음이 브랜딩에도 반영되고 있었던 셈이다.
왜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까. 왜 나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시대에,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은 무엇보다 큰 칭찬 아닌가. 실제로 '여성에게 기울어진 일터'라는 사회 문제를 비즈니스로 풀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맞고, 칭찬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좋은 일 한다'라는 말 안에는 보통 이런 뉘앙스가 담겨있다고 느껴진다. 돈 안 될 것 같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격려 또는 안쓰러운 시선. 나 같으면 그 일을 할 수도 없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는 선 긋기. 정확하게 어떤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으니 파이팅! 이라는, 부족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응원. (마지막은 전문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 이야기도 곧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돈 되는 일 아니면 세상에 의미 있는 일. 대개의 경우 일은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고,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경우는 몹시 드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시선 안에서 돈과 의미는 언제나 상충되는 가치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새로운 일을 만드는 건 불가능할까. 돈도 조금, 의미도 조금 챙기는 일은 애매해서 별로인 걸까. 일로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이 정말 돈 아니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의미밖에 없는 걸까. 이건 일의 가장 좋은 결과물이 '돈'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프레임 아닐까.
컨설팅을 마치고 난 후, 답보다 질문이 더 많이 생겼다. 그전까지는 스스로 묻지 않았던 질문들. 혹은 답을 대충 뭉뚱그렸던 질문들. '좋은 일' 말고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혹은 하고 있는지. 리브랜딩이 문제가 아니라 먼저 이 질문들에 답변해 볼 차례다. 진짜 중요한 질문이 뭔지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