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는 [브랜드 시트콤], 또는 [커리어 시트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이(강말금)는 영화 프로듀서다.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던 감독이 돌연 사망하면서, 찬실이를 불러주는 일터도 사라진다. 영화를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영화와 함께 일할 줄 알았는데 영화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서, 찬실이는 그동안 해왔던 일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러던 차, 찬실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할머니(윤여정)가 찬실이에게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어온다.
찬실: PD요.
할머니: 뭐? 그게 뭐 하는 건데.
찬실: 돈도 관리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 하는 그런 사람인데요.
할머니: 그러니까 그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찬실: 예? 아,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얼마나 이상한 일을 했으면 한 사람도 몰라. 됐어, 내가 다 알아들은 거로 칠게.
찬실이와 같은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나도 이런 상황을 안다. 내 일에 관해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어쩐지 말이 꼬이는 것 같은 상황.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하려고 하긴 하지만, 상대방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까 싶은 생각에 괜히 마음이 움츠러드는 상황. 그러다 보면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한 건 다 뭐였지?'라는 회의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자신의 직장이나 직업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할까 자주 상상해 봤다.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기 때문에 상상조차 잘 되지 않았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기자'라는 직업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조금 다른 스타일의 기사를 썼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사족이 필요했다. 아니 그보다 전에, 새로 창간하는 지역 주간지의 취재 기자가 되었을 때도 우리 매체를 아는 곳이 없어 "안녕하세요, 저는 00뉴스의 황효진 기자라고 합니다. 00뉴스는요..."라고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인사를 입에 달고 지냈다. '00일보요', '00신문입니다'라고 짧게 소개해도 괜찮은, 유명한 회사에 다녔더라면 일하기가 좀 수월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 시절이었다.
기자 일을 그만둔 후에는 내 일을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프리랜스 에디터로 일할 때는 칼럼도 쓰고, 가끔 인터뷰도 하고, 동료들과 독립출판도 하지만, 일이 없어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 정확히는 이 경우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 '요즘 무슨 일해?'라는 질문에 망설이다 '음... 백수야'라고 답하기 일쑤였다. 밀레니얼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회사에 창립 멤버로 합류했을 때는 '커뮤니티'가 무엇인지 나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했다.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그래서, 커뮤니티 만드는 게 뭐 하는 일인데?"라고 물어오면 "그런 게 있어요... 그냥 사람들 모아서 뭐 하고 그런 거예요...."라고 얼버무린 적도 많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각자의 일을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고통은 매우 구체적이고 타인의 고통은 단순하다는 말처럼, 나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입체적으로 다가오지만 타인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내게 잘 와닿지 않는다. 의사, 변호사, 교사처럼 어릴 때부터 좋은 직업으로 꼽혀 왔고 말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직업이라 하더라도 그 일들의 세부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지 못한다. 나의 일은 이 일을 하지 않는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늘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시대는 계속 변화하고, 새롭고 낯선 일들은 꾸준히 생겼다 사라지고,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을 알 수 없다. 각자가 볼 수 있는 반경은 무척 좁으며,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기만의 일을 나름대로 만들어가는 것뿐이다. 회사가 크든 작든, 유명하든 아니든,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직업이든 아니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게 맞나?' 고민하면서. 누군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어오면 어떻게든 내 일에 관해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 애쓰면서.
지금 나는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일'을 주제로 프로그램이나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하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몇 달째 휴방 중이긴 하지만 동료와 <시스터후드>라는 팟캐스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으니 'N잡러인가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그건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렇다고 내가 일하는 방식과 종류를 적확하게 담아낼 다른 강력한 단어를 찾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조금 구구절절하고 복잡하게 들리더라도 나의 일을 최대한 상세하게, 풀어서 이야기하고 싶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매체의 기자에서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리랜스 에디터로, 커뮤니티 비즈니스라는 낯선 산업에 몸 담은 기획자로 일하다 이제는 아주 아주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약간은 특수한 브랜드를 혼자 꾸려가는 자영업자가 됐다. 계획을 세우고 이 일에 도달한 것도, 참고할 만한 롤모델이 명확히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매일이 우당탕탕이다. 가끔은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 내가 똑바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고 겁도 나지만 실수나 실패도, 성취나 성공도 나만의 고유한 결과물이 될 거라는 게 마음에 든다. 보고 그대로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건 막막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멋대로 하면 된다'는 뜻 같아서 좀 홀가분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의 장르는 [브랜드 시트콤]이다. 때로는 '커리어 시트콤'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시트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흘러가는 누군가의 일상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거기서 어떤 한순간을 확대하여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만드는 장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은 대체로 평범하게 보이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게 하는 장르다. 혼자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해 나가는 과정, 한 마디로 똑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해나가는 과정은 얼핏 별 사건 없이 흘러가는 것만 같다. 종종 일을 했는데도 손에 잡히는 결과가 없어 '내가 뭔가를 하긴 한 걸까?'라는 의심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내가 분명히 한 일을 두고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 그 과정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앞으로 이 매거진에 실릴 글들은 이 음악과 함께 읽으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