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없이 커리어 운행하기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쓴다면, 어떻게든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제목이 있다. '미래 운행 정보'. 카카오맵 앱에서 미래의 특정 시간을 입력하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어떤 경로로 갈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계산해 주는 기능의 이름이다. 이 기능을 쓸 때마다 '미래 운행 정보'라는 단어가 근사하게 느껴졌다. 예측할 수 있는 미래의 정보가 있다는 뜻이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예상 가능한 정보가 있다니. 그런 게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올해 초에는 일에서 무척 큰 변화가 있었다. 함께 회사를 만든 동료가 이 일을 그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가치관도, 일하는 방식도, 그동안의 커리어패스도, 놓여있는 상황도 다른 만큼 각자의 생각과 의지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니 둘 중 한 명이 이 일을 멈추는 건 언젠가는 겪게 될 사건, 또는 언젠가는 내가 먼저 벌일 수도 있는 사건이라고 여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고 복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간 나는 동료에게 과연 좋은 협업 파트너였을까, 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그즈음 <큇: 자주 그만두는 사람은 어떻게 성공하는가>라는 책을 쓴 애니 듀크의 인터뷰를 읽었다. "'끊기'란 더 나은 일에 집중하기 위한 일종의 정리의 기술인가요?"라는 김지수 기자의 질문에 애니 듀크는 답한다.
"그렇습니다. 물론 인내와 그릿(Grit, 투지)은 이루기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을 계속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유해해요. 매몰 비용에 빠지기 시작하면 현실적으로 이루기 어렵고 가치를 다한 일인데도 손을 떼지 못하거든요. 어떤 일을 하든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야 할 때와 그만두어야 할 때를 아는 건 중요합니다."
"회사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효진 님이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누군가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답했다. "그런데요, 계속하는 건 오히려 쉽지 않나 싶어요. 그만두거나, 상황을 바꾸는 선택을 하는 게 더 어렵죠."
커뮤니티 만드는 일을 한 지는 햇수로 5년째다. 이 일을 할수록 커뮤니티 비즈니스란 그 자체만으로 수익이 그다지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 사람 손이 많이 닿을수록 서비스의 질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의 전문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명확히 깨닫게 됐다. 주변 사람들이 '요즘 일은 어때?'라고 물어오면 '재미있지, 돈은 안 되고'라고 웃으며 대답한 지 오래였다. 그런 일을 나는 왜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상황을 바꾸는 건 어렵고 귀찮으니까. 반면 하던 일을 계속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관성으로, 내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 일을 계속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내가 그간 쌓아온 역량을 적당히 발휘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 그저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매몰비용이 아까워서 그만두지 못하는 건 아닐까. 상황을 바꾸기로 한 동료의 선택이 새삼 용기 있다고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돌아보면 내가 자발적으로 한 선택이란 건 없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별 계획 없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옆에 잘 맞는 동료들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게 버거워질 때쯤 새로운 동료가 자신이 만드는 일터로 불러주었고, 또 그 회사가 문을 닫고 나서 함께 일했던 동료와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퇴사를 제외하면, 나의 커리어패스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동업을 해지하는 과정에서 도움말을 얻기 위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내게 물었다. "언니는 점 안 봐?" 나는 되물었다. "점을 꼭 봐야 해?" "자기 사업하는 사람들은 많이들 본다고 하더라고." 한 번도 직접 점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마음은 선뜻 이해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고,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혼자서는 불안하니 점을 통해 힌트라도 얻고 싶은 심정일 테다. 나는 점을 보는 대신 작고 얇은 수첩을 하나 샀다. (원래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타입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그리고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금 거리를 두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수첩의 제목은 '미래 운행 정보'. 소설을 쓰려고 진지하게 마음먹은 적도, 본격적인 노력을 한 적도 없어서 소설은 시작해보지도 못했지만 내 앞날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쓸 수 있으니 '미래 운행 정보'라는 제목은 이 수첩에야말로 어울리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질문을 띄워두고 내가 원하는 것과 내 일, 내가 일하고 싶은 환경에 관해 고민을 시작했다. 수첩의 첫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을 써뒀다.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펼쳐서 나의 욕구와 방향성을 스스로 살펴보기 위한 노트입니다. 새로운 시작도, 하던 걸 그만두는 것도, 지속하는 것도 너무 겁내지 않기로!” (노트 작성시작일: 2023.2.22.수)
고민해보고 싶은 항목들도 써넣었다.
- 뉴그라운드 이후의 운행 정보 (외부 상황과 내가 선택해야 하는 상황)
- 나의 현실(....이라고 쓰고 실은 갖고 있는 돈)
- 하고 싶은 일
- 할 수 있는 일
- 앞으로 수익이 날 만한 곳
- 내가 팔 수 있는 것(수익화할 수 있는 나의 역량)
- 나의 욕구(일과 삶에서 추구하고 싶은 방향)
이 중 가장 중요한 건 일에서 원하는 것을 넘어, 삶에서 원하는 방향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인지 알아야 어떤 일을 어떻게 할 지도 결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삶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맛있는 빵으로 식사를 하거나,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적어두는 일 같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는 삶. 출퇴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되는 삶.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한 삶. 여기까지 쓰고 깨달았다. 어? 나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일을 한 경력에 비한다면 결코 많은 돈을 안정적으로 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돈뿐만 아니라 시간과 인간관계도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원이라고 한다면 나는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누리며 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의 회사를 만들 당시 나의 욕구 중 하나는 '나를 둘러싼 일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대로 스스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뉴그라운드를 왜 만들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전에도 여성 커뮤니티를 만드는 회사의 구성원으로 일했던 나는, 회사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소속 없는 프리랜서로 계속 일할 것인가. 나는 그 사이에 있는 새로운 길, 스스로 나의 소속을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다. 혼자 일하는 것보다는 함께 일할 동료가 있는 게, 내 이름을 앞에 내걸고 일하는 것보다는 울타리가 되어줄 회사(혹은 브랜드)가 있는 게 내게는 더 잘 맞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일하는 환경뿐 아니라 일의 내용과 방식, 성격을 직접 설정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동시대 여성들과 지속적으로 만나고 '일하면서 어떻게 건강하게 나를 돌볼 것인가?' '내가 일에서 느끼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느낄 일의 괴로움을 막기 위해 어떻게 더 나은 협업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일을, 나는 좋아한다. 커뮤니티란 다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아직도 '이렇게 운영하면 성공적인 커뮤니티가 된다' 같은 정답은 모르겠지만,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이 일을 더 재미있다고 느낀다. 늘 어렵고, 그래서 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래서 누군가를 참고하기보다 내가 그때그때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 '뉴그라운드 일은 어때?'라고 물어오면 자신감이 사라진다. 목소리가 작아진다.
'창업을 한 건 사실인데, 사업이라고 부를만한 사이즈로 일을 하고 있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봐도 잘 모르겠다. 사업이란 크기를 불려 가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늘려가고 돈이 돈을 불러오는.... 그런 거라고 하던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내가 하는 건 사업이 아니지 않을까. 일과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법을 고민하자고 말하는 회사인데, 정작 회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지속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괜찮은 걸까. 수익이 날지 안 날지 늘 노심초사해야 하는 회사가, 사업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아직도 저 질문들에 적합한 답변을 찾지는 못했다.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라는 이유 말고 이 회사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회사를 만든 사람이 '모르겠다'는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해도 되는 걸까.... 이미 이 점에서 사업가로서는 탈락 아닌가.... 없어도 되는 일을 굳이 굳이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지만 일단은 이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을 아직은 찾지 못했으니까, 한동안은 또 계속해보기로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 문장처럼.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옳게 만든다."
_ 김민철,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