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베란다 창틀에 고인 빗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툭, 떨어진다. 낮은 곳으로 낙하한 물방울이 아스팔트 위에서 잠시 왕관 모양을 그리다 이내 흩어진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비의 장막에 갇혀 먹먹해지는 오후다.
방 안의 공기는 눅눅함을 한껏 머금고 있다. 건조대에 걸린 옷가지들은 잘 마르지 않는다. 덜 마른 면직물에서 배어 나오는 흐릿한 습기가 느껴진다. 나는 생의 후미진 곳에서 스며 나오는 해묵은 고독의 냄새를 떠올린다.
이럴 때 나는 제습기를 켠다. 기계가 낮은 소리로 숨을 쉬기 시작하면, 투명한 물통에 맑은 물이 조금씩 차오른다. 보이지 않던 공기 중의 수증기가 형체를 얻어 액체로 고이는 순간이다. 물통에 물이 떨어지는 낮은 소리는, 내면의 고여있던 침묵이 비워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슬픔과 불안은 대기 중의 수증기처럼 은밀하게 내면에 스며든다. 그것들은 소리 없이 자아를 지탱하는 기둥을 적시고, 단단하던 의지의 매듭을 헐겁게 만든다. 타인의 무심한 시선이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들이 마음의 습도가 되어 쌓이면, 어느새 마음의 구석진 곳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다.
나를 아끼는 일은 내 마음의 기상도를 가만히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습기에 축축한 감정을 방치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예의가 아니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내면의 창을 연다. 제습기가 물을 걸러내듯, 나는 독서와 글쓰기로 젖은 생각들을 햇볕에 널어 말린다. 마음이 젖어보아야 건조한 일상이 주는 평온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 내 마음이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다면, 나는 햇볕의 눈부심을 영영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우울의 그늘은 내가 얼마나 빛을 향해 걷고 싶어 하는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생의 무늬다.
새벽 산행은 나를 다스리고 다독이는 조용한 동행이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밖으로 나선다. 공기는 날카롭게 옷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다. 산의 초입은 완만해서 걷기 좋으나, 정상을 향할수록 길은 불친절해진다. 돌이 많은 구간에서 발목이 휘청이고 허벅지는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워진다. 심장은 정직하게 요동치며 입안이 점점 말라간다. 땀방울이 눈썹을 타고 흘러 눈가를 찌른다. 따갑다. 멈추고 싶다는 유혹이 발끝까지 차오르는 순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친 숨을 내뱉는다.
나는 안다. 이 고단함의 지점에서 비로소 마음의 근력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근육은 미세한 상처를 통해 완성된다. 무거운 무게를 견디며 섬유가 찢어질 때, 몸은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렇게 아문 자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두텁고 단단해진다. 상처가 힘으로 바뀌는 정직한 과정이다.
흔히 상처받지 않는 것이 건강함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참된 건강은 상처 입은 자리를 어떻게 보듬어 견고하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은 새로운 땅이 갈라지며 새싹이 돋는 소리와 같다. 감당하기 힘든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 그 압박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내는 과정에서 마음의 근육은 벼려진다. 나를 아끼는 것은 나약한 나를 무조건 감싸 안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거친 들판으로 나를 데려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성숙한 훈련이다.
산 정상에 올라 차가운 바람에 땀을 식힐 때, 다리에 전해오는 묵직한 통증은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가장 정직한 인사다.
하루의 소임이 끝난 텅 빈 거실, 유리창에 비친 한 사람을 본다. 불빛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은 오랜 세월이 빚어낸 지층이다.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강물처럼 흐르고, 머리칼은 서리가 내려앉은 겨울 들판처럼 푸석하다. 수십 년의 시간 동안 그는 매일 같은 문을 나서고, 삶의 가방을 메고, 주어진 책임의 무게를 견뎌왔을 것이다. 누군가의 부모로, 누군가의 반려자로 살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자신의 모난 부분을 깎아내야 했을까.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수공(手工)’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품어본다. 우리는 흔히 “수고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서 ‘손(手)’과 ‘지극한 정성(工)’의 의미를 읽어낸다. 사람의 손으로 정성 들여 빚은 물건에는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투박한 온기와 고유한 결이 깃든다. 기성품의 매끄러움에는 서사가 없다. 오직 손으로 더듬어 만든 수공의 삶만이 상처를 무늬로, 눈물을 광택으로 품는다.
지나온 시간은 수공예의 과정이었다. 세상의 거친 파고를 견디며 인내를 꿰매고, 늦은 밤까지 삶의 숙제들과 씨름하며 성실이라는 무늬를 새겼다. 소중한 이들을 위해 마음을 쓰고, 그들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던 시간들 또한 지극한 수공이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나라는 인생을 완성하기 위해 장인이 새겨 넣은 섬세한 문양이다.
나를 아끼는 법의 정점은 자기 연민을 넘어 자기 존엄을 마주하는 데 있다. 평범한 일상을 성실하게 버텨온 모든 이는 자기 인생이라는 유일무이한 작품을 빚어가는 장인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그리고 유리창 너머의 그 사람에게 나지막이 읊조린다.
“수공(手工)’ 했다. 정말 공들여 잘 살아냈다.”
이 말은 위로가 아니다. 내 삶의 모든 굴곡과 상처가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선언이자, 내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복원하는 것이다. 살아오느라 애썼고, 살아내느라 고생한 나에게 베푸는 최고의 경의다.
자신을 아끼는 것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마음의 기상도를 살피고, 고통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며, 매 순간 자신의 수고를 장인의 손길처럼 대우하는 일이다.
내가 나를 아끼는 것은 오래된 집의 서까래를 닦는 일과 같다. 먼지를 털어내고 윤을 내는 지루한 반복 끝에야 집의 뼈대가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타인을 진심으로 환대할 수 있는 마음의 영토를 얻는다. 내가 마른땅이 되어야 남을 앉힐 수 있고, 내 근육이 단단해야 타인의 짐을 함께 짊어질 수 있다.
다시 비가 내린다. 그러나 더 이상 습기가 두렵지 않다. 나는 일어선다. 창을 연다. 제습기를 끄고, 스스로 바람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공(手工)했다, 나의 생이여. 나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