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도시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먼 곳의 경적 소리가 적막의 농도를 한층 더 짙게 만든다. 30년 넘게 지켜온 나의 장소, 낡은 원목 책상 위에 스탠드를 켠다. 형광 불빛이 손때 묻어 반들반들해진 나뭇결을 훑고 지나갈 때, 그 아래 놓인 빈 종이는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처럼 고요하게 빛난다.
나는 펜을 든다. 손가락 마디에 맺힌 굳은살은 내가 보낸 밤들이 남긴 무구한 화석이자, 장차 닥쳐올 삶의 고단함을 막아낼 내면의 갑옷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하루라는 파도가 휩쓸고 간 해변에서, 미처 떠내려가지 못한 감정의 조약돌을 건져 올리는 고독한 어업이다. 나에게 30년은 흐른 것이 아니라 책상 위에 켜켜이 내려앉은 것이다. 기록하지 않은 시간은 증발하지만, 수집한 문장은 내면의 무게로 남는다.
이 습관의 뿌리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치열한 소란 속에 닿아 있다. 영종도 국제우편물류센터, 컨베이어 벨트 소리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나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쏟아지는 택배 상자와 화물더미 사이에서 몸을 섞다 보면, 인간은 거대한 기계 속에 끼어 있는 작은 부속품처럼 느껴진다. 차가운 금속성 소음과 먼지 자욱한 공기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노동은 고되다.
하지만 나는 그 소란의 틈바구니에서 고요한 문장을 원한다. 벨트 위를 무심히 흘러가는 상자가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도구이거나 간절한 그리움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그 풍경을 잡는다. 현장에서 건져 올린 날것의 사유들은 퇴근길 새벽 공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정갈한 활자로 자리를 잡는다.
첫 번째 지층은 경계의 지혜로부터 시작되었다. 노동의 피로와 청춘의 방황이 뒤섞여 나를 괴롭히던 시절, 나를 잠재웠던 것은 라인홀드 니부어의 문장이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분류 실수로 엉뚱한 팔레트에 우편물을 오구분 했던 밤이 있었다. 쏟아지는 자책 속에서 나는 쓴 밤공기를 들이켰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펼친 노트에서 마주한 이 문장은 그날의 실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았다. 이미 벌어진 실수는 받아들여야 할 과거였고, 다시 벨트 앞에 서는 것은 내가 쥐어야 할 용기였다.
기록이 쌓여 10년을 넘어서자 문장은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투과하는 시선이 되었다.
"진정한 지식은 눈에 보이는 정보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이다."
새벽 1 시, 물류센터의 공기가 가장 무겁게 내려앉는 시간이다.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며 벨트를 바라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저 벨트처럼 연결되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가 보낸 편지가 대륙을 건너 이 차가운 센터를 지나 다시 누군가의 손에 닿기까지, 그 보이지 않는 인연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은 삶의 이면을 더듬는 일이다.
매일 밤 기록을 매듭짓는 것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안경을 씌워주었다. 소음 속에 섞인 진심의 주파수를 맞추는 힘은 그렇게 길러졌다. 세월이 흐른다고 무언가 저절로 무르익는 법은 없다. 매일 흐름을 읽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30년이 지나도 그저 활자 위를 부유하는 소금쟁이에 불과할 뿐이다.
최근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문장은 비로소 타인의 그늘로 향한다.
"사람은 감정을 '이해받는 순간' 회복된다. 공감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확인'이다."
지난겨울,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통근버스 안이었다. 유독 고된 물량을 쳐내느라 어깨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던 내게, 평소 서먹하던 동료가 말없이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온기가 남은 그 캔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굳이 말로 다 하지 못한 노동의 고단함이 녹아내렸다. 그것은 논리적인 위로보다 강력한 감정의 확인이었다.
산문의 끝은 결국 사람을 향한 온기에 가닿아야 한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내 고통을 알아주는 단 한 줄의 문장, 혹은 단 한 사람의 공감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공감은 차가운 논리의 메스가 아니라 상처 난 자리를 가만히 덮어주는 따뜻한 손길이다.
거친 노동의 현장에서 나를 버티게 한 것은 근육이 아니라 밤마다 삼켰던 문장의 힘이었다. 매일 밤의 글수집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거룩한 식사였다. 흉년이 들어도, 가뭄이 닥쳐도 나는 창고 속에 쟁여둔 문장들을 꺼내어 그 온기로 추위를 견딘다.
글을 마친다. 스탠드 불빛을 끄면 어둠이 다시 방 안을 채우지만, 내 안에는 30년간 수집한 문장들이 은하수처럼 흐르고 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도 내가 쌓아 올린 문장의 지층은 단단하게 나를 받치고 있다. 어둠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내 안에는 소멸하지 않는 수만 개의 태양이 문장의 필사본으로 번뜩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죽어가는 시간을 포획하여, 내일의 나를 살릴 문장의 온기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