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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Aug 05. 2021

고추장 마니아인 영조, 탕평책, 사도세자.

제21대 왕 영조.

영조는 82세 (1694 ~ 1776)를 살았고 52년 (1724 ~ 1776)을 왕위에 있었다. 그는 조선왕조 27명의  임금들 중 가장 장수했다.


<고추장 마니아, 영조>


조선왕들의 평균 수명이 46세였다고 하니 영조는  역대 왕들보다 두배의 삶을 살았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기대수명은 82.7세다. 200여년 전, 그는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타고난 체질도 있겠지만 영조는 식사를 할 때 소식 ( 小食)과 오래 씹기, 때에 맞춰 먹기, 채소류를 좋아했고 적당한 단백질 섭취를 했다. 심지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꼭 밥을 먼저 챙겨 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 영조는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 고추장 없이는 식사를 못할 정도의 마니아였다. 왕실에서 만든 것보다 사대부 집의 고추장을 특히 더 좋아했다.


우리나라의 고추장에 대한 역사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추가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졌고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고 한다. 실제로 1720년 이시필의 소문사설에 고추장 만드는 레시피가 남아있다.


다른 한 가지 설은 이성계가 무학 도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 순창 고추장을 먹었다는 설화도 있다.

영조는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한 모양이다. 현대의 장수 비결을 그대로 실천한 셈이다. 고추장은 미생물로 인해 어떤 새로운 성분들이 만들어지고 영양이 향상되는 대표적인 발효식품이다.


고추장은 입맛 없거나 반찬이 없을 때도 군침을 돌게 만든다. 밥에 고추장을 슥슥 비벼  맛있게 먹은 기억은 누구나 하나쯤 있지 않은가..


<탕평책>


학창 시절 국사 시험에 단골로 나오는 공식이 있다. 영조하면 탕평책이다. 쉽게 말하면 당쟁을 그만하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정책을 말한다. 


앞서 제20대 왕 경종 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왕조의 당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훈구파 (조선 전기)

사림파 (조선 후기) 동인 >>북인, 남인

                                 서인 >>노론, 소론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된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는 영조의 배다른 형인 경종 때다.


집권 초기 노론을 배경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가 탕평책을 쓴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1724년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 정책을 하고자 의지를 밝혔다. 1730년 (영조 6년)에는 영의정을 노론으로 좌의정에 소론을 임명하고 이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상소를 금지시켰다. 1742년 성균관 입구에 탕평 비를 세워 당쟁으로 인한 국론 분열을 해소하고자 적극 노력했다.

영조의 탕평책에 불만 가진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정통성을 중요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를 늘 가지고 있었던 영조가 탕평책을 쓴 건 대단한 의지와 결단력이었다.


그만큼 영조는 신하들에게 밑 보이지 않으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기질 때문에 사도세자에 대해 과도한 기대감을 가진 듯하다.)


*무수리 :  조선시대 궁중에서 청소 일을 맡은 여자종을 말한다. *


*숙종 ♡♡ 희빈 장 씨 >> 20대 왕 경종

           ♡♡ 숙빈 최 씨 >> 21대 왕 영조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영조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균역법도 있다. 오랫동안 논의를 해왔지만 실행을 한 건 비로소 영조대에 이르러서였다.


균역법은 일종의 세금 제도다. 조선시대의 양인 남자들 (16 ~ 60세)은 군대를 가거나 군역을 져야만 했다.


여기서 말하는 군역이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군을 경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의무를 말한다. 따라서 군대를 가지 않고 대신 군포(옷감)를 2 필 냈는데 이를 1 필로 줄여준 제도가 균역법이다.


<사도세자>


늦은 나이(42세)에 얻은 아들을 끔찍이 아낀 아버지의 부정과 큰 기대가 실망으로 변해 갔고 결국 자기 자식을 비참하게 죽인 임금이 영조다.


건장한 체격의 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한 채 굶어 죽은 사건이 임오화변이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다.


부자 (영조 - 사도세자) 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 씨가 남긴 기록이다. 비교적 상세하게 그때의 상황이 담겨 있다.


부자간은 성격이 달라서 잘 맞지 않았다. 영조는 빠르고, 꼼꼼했고, 세자는 과묵하고 느렸다고 한다. 또한 무예를 좋아한 세자와는 달리 영조는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영조실록 영조 20년 11월 04일의 기록을 살펴보자.


<중서헌에 나아가서 세자가 강한 《어제 권학문》을 듣고 독서에 대해 묻다>


임금이 중서 헌(重書軒)에 나아가니, 세자가 임금을 모시고 앉았다.


춘방관(春坊官)을 불러서 입시하게 하고, 세자가 《어제 권학문(御製勸學文)》을 강하였는데, 춘방관이 그 글의 뜻을 진술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이어서 임금이 명하여 조변(趙抃)의 흑두(黑豆)와 백두(白豆)를 그릇에 두었던 고사에 의하여,


하루 사이에서 글을 읽는 것이 좋을 때에는 백두를 놓고 싫을 때에는 흑두를 놓아서, 그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강관에게 내보이게 하였다.


또한 궁관(宮官)들에게 신칙하여 뜻을 더해 인도하여 도와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강관 (講官) : 조선 시대에, 경연청(經筵廳)에 속하여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일을 맡아하던 정사품 문관 벼슬.*


어린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를 영조가 묻는다. 세자가 솔직하게 대답을 하니 영조는 기쁘다 라고는 했지만 세자가 공부에 뜻이 없음을 알아채고는 내심 꿍~  했을 수도 있다.


백두와 흑두를 써서 세자의 마음을 잡으려 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자간의 사이는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어린 세자가 글 읽기를 싫어한다는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나이 때는 당연한 거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지시와 일종의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동궁 시절과 비교하며 세자가 어떻게 글공부를 하는지 강관 (講官)에게 기록을 남겨 자신이 볼 수 있도록 하라고 한다.


한마디로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했다는 거다. 세자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야 했다.


세자의 나이 14세에 대리 청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부자간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한다.


영조는 대리 청정을 맡기면서 신하들에게 세자의 권위를 깎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잘하면 잘하는 데로 꾸지람을 듣고 못하면 그런대로 화를 내고 점점 세자는 아버지가 두려워져 갔다.


영조는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하는 일마다 못 미더웠고 정사를 믿고 맡기지 못했다. 세자가 잘할 수 있도록 기를 살려주는 응원은 어림도 없었다.


세자는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까 봐 소신 있게 일을 하지 못했다. 모든 일마다 영조에게 물어봐야 했다.(세자에게 전권을 준 세종과 비교가 된다. 의관조차 제대로 입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아버지에게 세자는 몸도 마음도 병이 깊어져만 갔다.


심지어 매년 사도세자의 생일에는 신하들 앞에서 꾸지람을 듣고 공개망신을 받았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부자간의 갈등은 골이 깊어졌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늘 위축되고 혼이 날까 봐 전전긍긍했던 세자는 점점 미쳐갔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적대감이 실린 정신병을 앓게 된 그는 궁궐 밖에서 여승이나 기녀들과 어울렸다. 그러다가 화를 조절하지 못하면 궁녀나 내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다.


하루에 6명을 살해하고 내시의 목을 벤 후 들고 다니며 아내 앞에 던지기도 했다. 의대증에 걸려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후궁까지도 때려죽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광적인 살인이었다.

이 비행을 보다 못한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영조에게 고변을 한다.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품고 있던 영조는 세자의 비행을 듣자 격노를 한다. 이에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요구했지만 세자가 머뭇거리자 마침내 뒤주에 가두고 8일 만에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자신의 아들에게 영조는 곧바로 시호를 내리는데 조금 아이러니하다.


사도 세자의 사도(思悼)는 그가 사망하자 영조가 즉시 내린 시호다.

아들을 그렇게 미워했음에도 슬퍼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호를 내린 영조를 두고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뒤주에 가두라고는 했으나 보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정말 죽을 줄 몰랐는다는 다. 세자의 사망 소식을 듣자 영조는 매우 놀라고 슬퍼했다. (이 주장의 근거는 250년 만에 공개된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이다.)


영조가 탕평책을 썼다 하지만 실제 정권은 노론이 잡고 있었다. 소론 쪽에 정치적 성향이 있던 사도 세자를 노론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한 결과라는 생각도 있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장 현재의 정치 상황만 봐도 음모와 술수, 억측이 난무하다. 하물며 200여 년 전의 일을 어떻게  수 있겠는가. 다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영조실록, 한중록을 참고로 추측을 할 뿐이다.


어찌 됐든 영조는 자식을 비참하게 죽인 매우 혹독하고 비정한 아버지였다.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뒤주의 벽을 긁어가며 '살려달라 ' 애원했던 사도세자는 비운의 역사에 남았다.


영조의 능은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20에 있다.



사도세자의 능은 경기 화성시 안녕동 187-39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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