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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ul 29. 2021

장희빈의 아들 경종, 우울증으로 인한 발기불능이었나..

제20대 왕 경종.


어머니(장희빈)가 너무 보고 싶다. 아버지(숙종)는 나를 저리도 미워하는지.. 내가(경종) 어릴 적, 아버지는  얼마나 다정하고 인자하셨는가.. 


체중이 갑자기 늘었고 소화도 잘 되지 않는다. 마음이 이토록 어지러우니 건강이 좋을 수 있나..


숙종은 9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그중 역사에서 거론되는  인현왕후, 장희빈, 숙빈 최 씨 3명으로 추려본다.


인현왕후 >> (자식을 낳지 못함)

장희빈     >> (경종)

숙빈최씨 >> (영조)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이다. 숙종은  아들을 낳지 못한 인현왕후를 폐위한다. 장희빈을 왕비로 올리고 경종을 원자로 삼는데 이를 반대한 서인을 남인으로 교체한다. 이 사건이 숙종 15년(1689)에 일어난 3번의 환국 중 2번째인 기사환국이다.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던 시절에 태어난 경종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 3번째 환국인 갑술환국 때 서인이 다시 집권을 하자 장희빈은 왕후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훗날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 씨가 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며 발고를 하자 숙종은 사약을 내린다.


장희빈죽음은 13세의 경종에게 평생을 안고 가야 할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때부터 그는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고 정치세력인 노론의 견제를 받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간다.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고자 수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 과거 연산군의 폭정이 있었기에 혹시라도 경종이 그렇게 될까 봐 노론은 그를 누르려 애를 썼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약을 받은 건 연산군과 경종이 똑같다. 


그러나 집권 초기 연산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기반을 다질 시간이 있었고 나중에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는 내심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에 비해 경종은 노론에 의해 집권 초기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숙종과 노론은 숙빈 최 씨의 소생 연잉군 (영조)를 세자로 삼으려 했지만 경종은 트집 잡힐 빌미를 주지 않는 처세로 결국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시대의 당쟁을 큰 틀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훈구파 (조선 전기)

사림파 (조선 후기) 동인 >>북인, 남인

                                   서인 >>노론, 소론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된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는 경종 때다.


임금에게 힘이 없으니 서로의 주장이 옳다며 싸우기를 일삼았다.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강경파였고 소론은 경종에게 힘을 실어주는 온건파였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다음 왕을 이을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영조)을 세재로 삼고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며 압박을 했다. 소론은 이에 대해 경종의 나이가 아직 젊으니 그렇게 까지 추진하려 함은 역적이라며 반대를 했다.


소론은 이때다 싶은 명분을 찾았다. 대대적으로 노론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신임사화다. 1721 ~ 1722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노론의 압박과 소론의 노론 숙청 과정에서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경종의 힘은 미미했다.



경종은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자녀가 없던  불임설에 관해 사실인 듯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유명 강사인 설민석도 방송에서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일으켜 역사 전공자들이 이의를 제기한 내용이다.


어머니(장희빈)가 사약을 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 (경종)이 보고 싶다고 했다. 아들이 가까이 오자 장희빈은 이 씨 왕조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경종의 중요한 부분을 확 잡아당겼다. 경종은 고통스러워하며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다.

이 때문에 경종이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는 거다.


장희빈은 자신의 죽음에 한을 품었고 이를 풀기 위해 아들인 경종에게 해를 끼쳤다는 건 뭔가 모순이 있다. 이 이야기는 실록의 기록에도 없고 야사에서 전해진다.



다만, 경종이 발기부전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은 있다. 경종실록 2년. 6월 19일이다.


국본(國本)을 미리 세우는 것은 종묘(宗廟)를 중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전대(專對) 359)의 임무를 받은 자가 사리에 근거하여 진주(陳奏)하고 준청(準請)을 기약함은 사리상 당연한 것인데,


지난번 자문(咨文)을 찬술(撰述)한 사람은 감히 ‘위약(痿弱)’이란 두 글자를 제멋대로 성궁(聖躬)에 더하였으며, 피인(彼人)과 문답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위질(疾)이란 말을 다시 되풀이하였습니다.


註 359]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나간 사람이 본국과 상의 없이 임의로 물음에 대답하거나 또는 임시로 일을 처리하던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할 두 단어는 위약(痿弱)위질(痿疾)이다. 이는 남성이 발기가 잘 안됨을 뜻한다.


*발기 불능, 음위(陰痿), 음위증 : 음경의 발기가 잘되지 아니하는 병적 상태. *


다음은 위 내용의 배경이 된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세자(아들 )나 세제(형제) 책봉은 청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연잉군 (영조)을 세제 책봉받는 과정에서 청나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경종의 나이가 젊은데 왜 동생을 세제로 삼으려 할까..


청에서 묻자 사신으로 갔던 노론의 이건명, 윤양래 등이 우리나라의 왕은 발기불능이라 자식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청나라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미움과 노론의 끊임없는 견제에 경종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어려서부터 건강도 좋지 않았고 삶에 대한 의욕조차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스트레스로 병든 마음은 결국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경종은 고도 비만이었음을 말해준다. 더위를 많이 타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인 다한증을 앓았다고 한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건강하지 못해 자주 병석에 누웠다.


재위 4년, 36세의 나이에 경종은 단명을 한다. 독살 정황이 의심되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병석에 누운 경종에게 대비전에서 게장과 생감을 보내왔다. 어의들은 이 음식들이 서로 궁합이 맞지 않으니 같이 올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연잉군(영조)은 이걸 무시하며 올릴 것을 명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은 경종에게  이 음식들이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날 밤 경종은 복통과 설사를 하며 탈수 증세까지 있었다. 다음날 연잉군은 한술 더 떠서 인삼차를 올리라 했는데 이 또한 경종이 먹는 한약재료와 맞지 않는다며 강하게 반대하는 어의를 무시했다고 한다.



동의대학교 이해웅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경종은 위장관 감염성 질환으로 급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궁합이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권한 연잉군 (영조)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일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경종은 살육의 정쟁을 견디다가 안타깝게도 재위 4년, 짤막한 조선왕조 임금의 역사에 남았다.


경종의 무덤은 의릉이며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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