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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ul 16. 2021

현종 시대 예송논쟁, 최악의 기근, 자식의 인육을 먹다

제18대 왕 현종

현종 시대 최대의 사건인 예송논쟁에 대해 알아보자. 예송논쟁은 예법에 관한 논쟁이다.


조선시대의 왕족은 경국대전, 양반은 주자가례라는 책 속에 적힌 예법을 따랐다고 한다.


잠시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인조와 효종의 가계도를 살펴보자.




위에서 보듯 인조는 5명의 부인에게 6남 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여기에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자의대비)를 주목해보자. 예송 논쟁에 있어 핵심적인 인물이다.


 <1차 예송 논쟁>


효종의 아들인 현종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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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할아버지 ) ♡♡ 인렬 왕후 (할머니, 정비)

                                -소현세자(첫째 아들)

                                -봉림대군(둘째 아들, 효종)


                             ♡♡장렬왕후(할머니, 계비)


효종 (아버지)      ♡♡인선왕후 (어머니)

                                -현종 (아들)


---♡---♡---♡---♡---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조선은 서인과 남인의 내분에 휩쓸린다. 그 이유는 바로 현종의 할머니 장렬왕후가 상복을 몇 년 입느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법상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니 1년이 맞다 하고 남인은 실질적으로 왕위를 계승했으니 첫째 아들과 마찬가지이므로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머니(장렬왕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의 생각이 달라 다툰 것이 1차 예송논쟁이라 하겠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아들(효종)이 죽었는데 계모(장렬왕후)상복을 1년과 3년을 입는게 어찌 그리도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을까.


오늘날 여야 양당 간의 정책에 대한 논쟁을 보면 알 수 있을듯하다. 결국 주도권 싸움이다. 남인의 주장대로 상복을 3년 입으면 효종이 비록 둘째였지만 실제로 장자처럼 왕이 됐으니 정통성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서인의 말처럼 상복을 1년 입으면 왕(인조)의 둘째 아들임을 인정하게 되므로 임금(효종)은 정통성이 부족하게 된다. 


이 두 가지의 논점은 왕의 힘과 남인, 서 인간의 정국 주도권에 대한 문제인 거다.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이 승리한다. 둘째가 왕이 됐으니까 부등호로 표현하자면 정통성이 부족한 임금(현종) 왕권 약화, 남인 < 서인으로 결론 난다.


그로부터 뭔가 찜찜한 채 15년이 흐른 후  2차 예송을 논하게 된다.


<2차 예송 논쟁>


다시 현종의 입장에서 가계도를 본다.


---♡---♡---♡---♡---


인조 (할아버지 ) ♡♡ 인렬 왕후 (할머니, 정비)

                                      -소현세자(첫째 아들)

                                      -봉림대군(둘째 아들, 효종)


                               ♡♡장렬왕후(할머니, 계비)


효종 (아버지)      ♡♡인선왕후 (어머니)

                                      -현종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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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예송논쟁은 아버지 (효종)의 죽음을 놓고 할머니 (장렬왕후)가 상복을 1년 또는 3년을 입느냐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었다.


2차 예송논쟁은 어머니 (인선왕후)가 사망하예법 문제를 두고 또  서인과 남인은 정권다툼을 벌이게 된다.


예법을 보면 시어머니인 장렬왕후는 첫째 며느리가 사망했을 때는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고, 둘째 며느리가 사망을 하면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


남인은 첫째 며느리 이므로 시어머니인 장렬왕후가 1년간, 서인은 둘째 며느리 이므로 9개월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예송논쟁은 현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서인의 힘에 눌렸으나 2차 예송 논쟁은 왕권강화, 남인 > 서인으로 귀결된다.


망국으로 가는 원인인 당쟁예송논쟁으로 인한 서인과 남인의 세력 다툼으로 현종 시대는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


<조선 최악의 자연재해와 기근>


오늘 아침 신문에 기상이변으로 서유럽 쪽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인명 피해가 크다는 기사가 실렸다. 독일은 100년 만의 폭우였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점점 예측을 불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최악의 자연재해와 기근이 현종 때에 있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있다.


현종 개수 실록 , 현종 12년 (1671년) 1월 ~ 12월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니 우역, 염병, 전염병, 기근, 우박, 홍수, 지진, 굶고 병든 자,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 반복된다.


1월 03일. (경상도에 영역으로 2백여 명이 죽다)


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5천1백여 명이었는데 여역이 잇달아 번져서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소의 역질도 계속 심하게 번졌다.


1월 11일. (전라 감사 오시수가 기근의 참상을 보고하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치계하였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 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도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을 파서 관을 뻐개고 고장(藁葬)을 파내어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


빌어먹는 무리들은 다 짚을 엮어 배와 등을 가리고 있으니 실오라기 같은 목숨은 남아 있지만 이미 귀신의 형상이 되어 버렸는데, 여기저기 다 그러하므로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감영(監營)에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수가 무려 1백90명이나 되고,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흉년이라 하여 용서해 주지 않는데 한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어서 그 수를 셀 수 없고, 돌림병이 또 치열하여 죽은 자가 이미 6백7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2월 03일 (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많이 발생하다.)


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2만 3천5백53명이고 함경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4천8백69명이었다. 전라도에서 정월 이후로 굶주린 백성 가운데 얼고 굶어 죽은 자가 2백39명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7백52명이었다. 평안도는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6백48명이었다. 경기는 정월부터 여역으로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3월 18일 (도성에서 많은 백성이 여역으로 죽다.)


이때 굶주린 백성들이 도성으로 모여들어 모두들 죽소(粥所)에 나갔다가 밤에는 거리에서 자므로 나쁜 기운이 찌는 듯하여 서로 전염되어 며칠 동안 신음을 하다가 번번이 죽어나갔다.


그리하여 문밖으로 실어내는 수레가 날마다 잇따랐는데, 그중에는 혹 귀신처럼 됐으나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사람도 많이 섞여서 쌓인 시체 가운데에 들어갔다.


귀한 집이건 천한 집이건 독한 여역이 두루 차서 마치 불이 치솟듯 하였으므로 일단 여력이 걸린 자는 열에 하나도 낫는 자가 없고 심지어는 온 가족이 몰살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놀라고 경황없이 허둥대는 것이 마치 병화(兵火)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 경황의 비참함이 이러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당초 도성 안에 진장(賑場)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어지러이 모여서 이런 우환을 빚어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4월 03일 (제주 목사 노정이 제주의 참상을 아뢰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였다. "본도(本島)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천2백60여 인이나 되고 살아남은 자도 이미 귀신 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먹었기에 경내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어서 마소를 잡아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강물에 버려지고, 굶주린 사람들이 귀신 형상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농사를 지을 시기 제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니 흉년이 들었고 여름 장마철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거기에 전염병까지 창궐했으니 백성들의 삶은 돈이 많거나 적거나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


실록의 현종 12년 3월 21일 기록은 가히 충격적이다. 자식이 죽자 어미는 시체를 삶아 먹는 일이 일어났다.


(충청 감사 이홍연이 자식을 삶아 먹은 사비 순례에 관해 치계하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기를, "연산(連山)에 사는 사비(私婢) 순례(順禮)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살면서 그의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소문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과연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른바 순례는 보기에 흉측하고 참혹하여 얼굴 생김새나 살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미친 귀신같은 꼴이었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잠시 엄히 가두어 놓았습니다. 해조를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연산 사람이 아들과 딸을 삶아 먹은 변은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


자애로운 성품은 천부적으로 다 같이 타고나는 것인데 그가 흉측하고 완고하더라도 어찌 지각이 없겠습니까.


심한 굶주림에 부대껴서 이토록 악한 짓을 하였으니, 이것은 교화가 크게 무너진 데에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진휼의 정사가 허술해서 그런 것입니다.


도신(道臣)은 먼저 수령의 죄를 거론해야 할 것인데 면의 책임자들만 다스리고 말았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살아있는 아이들을 죽여서 먹은 줄 알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확인해보니 병들어 죽은 자식들을 아먹었다고 한다.


 》》》》》》》》》》》》》》》》》》》》》》》》》》》》》》》》》》


다음은 딴지 일보의 2016. 10.11 기사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글이다. 기사의 제목은 전쟁보다 끔찍했던 조선의 자연재해, 경신 대기근이다.


<<1670년과 1671년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5만 2천 명이었으며,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2만 3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사망자 비율은 전라도가 가장 높았으며(1만 2500명, 54%), 경상도가 그 뒤를 이었다.(4천 명, 17%). 임진왜란에서 승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전라도의 곡창지대가 대부분 온전히 보전되었기 때문인데, 이번엔 전라도가 제대로 타격을 받았고, 이는 중앙 정부의 진휼 미 확보를 어렵게 했다.


1671년 12월, 2년의 기근과 전염병으로 총 1백만 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1669년 기준으로 조선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516만 명이었고, 추산되지 않은 사람까지 생각하면 최대 1000만 내외였다. 즉, 2년 간의 대기근으로 인구의 10%~25%가 사망하고 절대다수가 기아를 체험했다는 것이다.>>



현종 재위 기간 내내 자연재해와 전염병,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정신줄을 놓아버렸을까. 부모를 버리고 죽은 자식을 먹는 사태까지 일어났으니 참으로 놀랍고 안타깝다.


숭릉은 현종의 능이다.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건원릉(태조), 현릉 (문종)의 능이 인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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