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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ul 10. 2021

효종의 북벌론과 하멜의 표류, 의료사고로 인한 사망

제 17대 왕 효종.


' 나는 강한 군사력을 키워 그들에게 반드시 복수하리라. '


인조승하하자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다. 이분이 효종이다.


40세 (1619 ~ 1659)를 살았고 10년 (1649∼1659)을 재위했다


<효종 하면 북벌론>


그를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게 있다. 북벌론이다. 쉽게 요약하자면 강한 나라를 만들어 ' 청나라 '를 치자는 말이다.


봉림대군 (효종)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8년을 고생했다. 국토가 유린당함은 물론이고 청으로 끌려간 백성들을 보며 어쩌다 이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일까.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 국경에 성을 쌓고 무신 우대 정책을 하며 조용히 군대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북벌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백성들은 두 번의 호란으로 인해 다시 일어서려면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청나라는 중국을 전국 통일 (1645 )하며 힘이 더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나라는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멸망, 다시 후금이 되어 청이 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나라다. 후금이었을 때 우리는 정묘호란을, 청으로 나라 이름이 바뀌었을 때 병자호란을 겪었다.


' 쑹화강[松花江]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이라 불리었다. '


                       -  두산백과 -


여진족은 고려시대에 북방에서 우리와 교역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충돌했다.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나라명을 바꾸며 힘을 키워나가는데 우리는 왜 군사력을 키우지 못했을까.


임진왜란을 치른 선조, 두 번의 호란을 겪은 인조,  단순히 임금의 리더십 부족이 국가를 존폐 위기까지 몰아가지는 않았을 거다. 세조 이후 조선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시작된다.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동인은 또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 이른바 당쟁이 우리가 힘을 기르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국력을 키우지도 못한 채 내부 갈등으로 서로를 모함하며 죽이는 세월을 반복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채 효종 때 잠시 국력을 키우려 했지만 그게 참 쉽지 않은 문제였다.



효종이 아무리 북벌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한들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해 있었고 관료들 또한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임진왜란처럼 무방비의 군사력을 갖추진 않게 되었음은 그나마 긍정적인 평가라 할 수 있겠다.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기록>


조선왕조 실록 1653년, 효종 4년 8월 6일의 내용이 흥미롭다.


' 제주 목사 이원진이 난파당한 서양인에 대하여 치계하다. '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천[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 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 삭기(郞可朔其) 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 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네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제주도의 관리가 효종에게 급하게 서면 보고를 했는 모양이다. 배 한 척이 난파를 당했다. 38명이었고 우리와는 생김새와 모양새도 다른 서양인이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을 물으니 오늘날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려했다. 이들은 화포, 즉 총기를 잘 다루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렇다. 이들 중에 하멜이 속해 있었다.

1666년 그는 7명의 동료와 함께 조선을 탈출했다. 14년간 조선에서 겪은 일들을 책으로 출간을 했는데 이 책이 ' 하멜 표류기' 다. 임금부터 일반 백성까지 당시 조선 시대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귀한 역사자료가 되었다. 조선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린 최초의 책이다.


<효종의 사망, 의료사고로 추측>


어떤 노인이 효종의 죽음을 예언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1659년 효종 10년 윤 3월 26일 병술 3번째 기사 내용이다.


 ' 어떤 노인이 경복궁의 옛터에 초옥을 짓고 이어할 것을 아뢰다. '


이때 어떤 노인 하나가 스스로 거사(居士)라고 일컬으면서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밖에 와서 엎드려 말하기를,


"금년 5월 국가에 재화가 있게 될 것이니, 경복궁(景福宮)의 옛터에 초옥(草屋)을 짓고 즉시 이어(移御)하여 재화를 물리치는 굿을 하소서."

했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요망한 것이라고 하였다.


거사 (居士)란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내공이 쌓인 어느 노인이 나라의 앞날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신기하게 그해 1659년 5월 정말로 효종이 생을 달리한다.


효종이 승하한 날의 상황이 실록에 자세히 남아있다.


' 대조전에서 승하하다. '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증(膿症)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고, 유후 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다시 침을 맞을 것을 의논하자고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쳤다.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하고 이어 제조 한 사람을 입시하게 하라고 하니, 도제조 원두표가 먼저 전내(殿內)로 들어가고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이 뒤따라 곧바로 들어갔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 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약방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사관(史官)과 제신(諸臣)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御床)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 효종 10년 5월 04일 조선왕조 실록 -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어의가 실수를 한 것 같은 정황이다. 사람의 얼굴 중 관자놀이 부근에는 천측 두동 맥이 흐른다.


이비인후과 김한수 교수는 효종의 종기가 하필 그 자리에 나서 고름을 빼기 위해 놓은 침이 동맥을 뚫어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그의 논문에 게재한 바 있다.


멀쩡히 살아 있던 효종은 어의가 동맥을 잘못 건드린 바람에 의료사고로 황망히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렇듯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북벌론은 힘을 잃게 되었다. 그 당시 세계사의 흐름으로 볼 때 청나라는 조선이 아무리 군사력을 증강시켜도 이미 따라갈 수 없는 강대국이었을 수 있다.


혹자는 그가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라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효종은 선조, 인조처럼 무능하지 않은 임금이었다.


효종의 묘는 여주 영릉이다. 세종의 능 이다. 세종대왕은 곁에서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효종의 노력을 보고 흐뭇해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1번이 세종 대왕의 능이고 10번이 효종의 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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