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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un 27. 2021

파란만장한 인생 광해군과 실록에 기록된 UFO

제 15대 왕 광해군


<< 제주도 유배 생활의 광해군>>


' 배가 고프구나. 열흘에 한 번씩 주는 양식이 터무니없으니 목숨만 겨우 연명할 뿐. 배가 몹시 고프다. 담장 밖으로 한걸음조차 옮길 수 없으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니로구나. '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중 광해군이 느꼈을 감정을 잠시 생각해본다.


위리안치 ( 圍籬安置 )라는 형벌이 있다.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 중죄인에 해당하는 형벌로서 가시나무 대신으로 쓴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았으므로 이 형을 받은 사람은 대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내졌음.


              -  한국 고전용어사전 -



광해군의 유배생활은 가시로 둘러싸인 집에서 사는 혹독한 삶이었다. 먹는 음식조차 부실했으니 하루하루 삶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겠다.


강화도로 함께 유배된 광해군의 아들 이지 (李祬)가 있었다. 폐세자인 그도 위안리치 형을 살았다. 인두와 가위로 땅굴을 파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 폐세자빈은 얼마 후 목을 메달아 자살을 했으니 그야말로 광해군의 가족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의 일생>>


조선의 국왕으로 전쟁 중인 나라를 현명하게 이끌었던 임금이 어쩌다가 이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광해의 삶은 다음과 같다.


1575 ~ 1608 년

(출생, 왜란 중 세자에 오름)

1608 ~ 1623 년

(15년간 왕으로 재위) 

1623 ~ 1641 년

(18년간 유배 생활중 사망)


선조의 가계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 - 8명의 부인, 14남 11녀의 자녀


왕비 (2명)

의인왕후 - 아이가 없음

인목왕후 - 영창대


후궁 (9명)

첫째 후궁  아들이 광해군

                            

왕후의 아들인 영창군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어째서 후궁의 자식인 광해군이 왕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파죽지세 (破竹之勢)로 올라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양으로 도망쳤다. 이때 국난에 있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됐다.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평양도 안전하지 못해 북쪽으로 떠난 일행은 영변에서 두 갈래 길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광해군은 평안도 지역으로 떠났다.


이를 분조(分朝) 라 한다. 두 개의 조선으로 나눈다는 의미라 하겠다. 1592년 임진왜란은 물론 1597년 정유재란 ( 일본의 2차 침략 )까지 광해군은 어느 군주 못지않은 리더십으로 조선을 이끌었다.

명나라에서 조차 무능한 선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광해군을 임금으로 삼고자 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선조는 자신의 아들을 의심하고 열등감을 가졌으니 참 못난 아버지였다.


왜란이 끝나고 1606년에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 군이 태어났다. 이는 정궁(正宮)의 자식이다. 선조는 이미 세자가 된 광해군을 밀어내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의중이 있었다. 영창군은 왕후에게 태어났고 광해군은 후궁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유명 (幽 明)을 달리하자 광해군은 이이첨이라는 대북파의 농간에 휩쓸려 형인 임해군을 죽였다. 또한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유폐한 후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몰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를 보낸다. 영창대군은 강화도에서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 부사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광해군은 2번의 왜란 동안 국가적 위기에 잘 대처했고  중립외교로 후금과의 관계를 현명하게 이끌어냈다. 백성을 위한 세금 개혁인 대동법을 처음 실시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서자 출신에 대한 불안감이었을까.. 왕권을 유지하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왕후인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적통인 동생을 죽인 정치적 행위는 서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킨다. 광해군은 폐허가 된 궁궐을 다시 재건하는데 지나친 무리수를 두어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한다.


광해군의 이런 행동들을 PTSD로 보는 시각도 있다.


PTSD는 신체적인 손상 또는 생명에 대한 불안 등 정신적 충격을 수반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적 외상을 받아 나타나는 정신 질환이다. 충격 후 스트레스 장애,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 외상 후 증후군, 트라우마라고도 한다.


                       -  위키 백과 -


전쟁터에서 겪은 죽느냐 사느냐의 혼돈과 아버지 선조의 왕권에 대한 도전 의심에 시달린 광해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는 주위 인물들이 그의 불안한 심리를 부추겼다.


<<능양군의 복수, 인조반정>>


연산군의 중종반정에 이어 광해군 역시 쿠데타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인조반정은 능양군과의 악연도 있었다.


능양군의 아버지는 선조의 둘째 후궁 아들인 정원군이다. 여러 명의 부인을 둔 조선 왕들의 가계도는 조금 복잡하다.


쉽게 말해서 능양군은 선조의 손자며 광해군은 삼촌이 된다.


선조- 첫째 후궁 - 광해군

           둘째 후궁 - 정원군 - 능양군,          

           능창군


광해군은 능창군 즉, 능양군의 동생을 역모죄로 몰아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데 이때 능양군은 분노하고 앙심을 품게 된다.

훗날 서인 세력은 반정을 주도하게 되고 능양군이 선두에 서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능양군이 인조다.


국가의 위기에 잘 대처하고 수습했지만 왕권을 둘러싼 갈등 속에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재위 기간 15년보다 더 길었던 18년의 유배 생활을 끝에 1641년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사연도 많고 우여곡절과 시련의 파란만장한 을 살아낸 광해군이다. 왕은 혼자서 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 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고민해야 했으나 권력을 위한 다툼이 인조반정이라는 결과를 낳게 했다.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의 묘가 을씨년스럽다.

<<광해군 때 나타난 UFO>>


글 마감 즈음 노컷뉴스를 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미국 정부가 의회에 UFO(미확인 비행물체)의 목격 사례를 정식 안건으로 보고 한다는 내용이다. UFO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미 국방부는 최근 몇 년 동안 불가사의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현재 기술을 넘어선 기동성을 보여준 비행 물체를 찍은 영상이 '진짜'라며 공개한 바 있다. 고프 국방부 대변인은 "식별됐든 식별되지 않았든 어떤 항공기가 우리의 영공을 침범했다는 보고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 노컷 뉴스 기사 내용 -

조선왕조실록 1609년 광해군 1년 9월 25일 기록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 강원도에서 일어난 기이한 자연현상에 대해 강원 감사 이형욱이 치계하다. '


강릉부(江陵府)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맑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차 커져 3, 4장(丈)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했습니다. (중략)


UFO에 관한 기록의 일부분이다. 오늘날 목격되는 UFO와 비슷하다. 미국 국방부도 인정한다고 하니 영화 속의 미래가 현재가 되었듯 조만간 외계 생명이 존재를 드러낼 수도 있겠다.


타임머신의 일환으로 광해군 시대에 누군가 우주선을 타고 떨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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